'차라리 해임을 권유하라'는 말까지...답답한 금융당국의 '미필적 고의' 전략
입력 2022.12.28 07:00
    • (그래픽=윤수민 기자)
      (그래픽=윤수민 기자)

      "정부 당국 의중이 궁금하다. '이 사람 꽂으라'고 낙하산을 내려보내진 않는데 '너 나가라'는 신호는 줄기차게 보내고 있다. 관치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외풍이 없다고 보기도 어렵다. 교묘하게 '이 사람 연임시키면 곤란할 텐데?' 하는 선에서만 압박을 이어가고 있다" (한 금융회사 고위 임원)

      금융회사 임원이 내부통제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금융감독원이 지배구조법에 의거해 중징계를 내렸다. 그런데 법정에서 연거푸 패소했다. 이번엔 금융위원회가 비슷한 문제를 두고 자본시장법을 들어 중징계를 결정했다. 그리곤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만장일치로 결정된 건인데, 당국 뜻이 곧 정부 뜻이다"라고 덧붙였다.

      금융권에서는 대개 이를 '알아서 나가라'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금융당국이 머리를 잘 쓰는 거란 평가도 있다. 민간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를 법률에 따라 징계했을 뿐, 낙하산을 직접적으로 내려보내진 않았으니, 선을 넘는 건 아니란 얘기다. '누구를 앉혀라'고 노골화하기 전까지는 어쨌거나 법이 정한 선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온다. 

      고의성을 입증하기 어려울 뿐, 드러난 정황만 놓고 보면 금융당국에서 민간 금융사 수장의 자발적 교체를 압박하고 종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금융당국에선 압박이 아니라고 해도, 금융사들이 압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아무런 의도가 없다고 믿는 이도 거의 없다. 이를 두고 '미필적 고의도 고의다'라는 지적이 나온다. 

      물론 징계를 받은 해당 경영자에겐 '실효성 있는' 내부통제 기준을 마련하지 못해 금융 사고를 터뜨린 책임이 없지 않다. 만약 소송에서 이긴다 해도 도의적 책임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도 '무엇이 실효성 있는 기준인지' 스스로도 정하지 못하는 당국이, 해당 경영자가 알아서 물러날 때까지 어정쩡한 징계를 반복하면서 분위기를 조장하는 것을 정당화할 순 없다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차라리 이럴 거면 금융당국이 문제 있는 금융사 경영진을 콕 집어 해임을 요구하라는 볼멘 소리가 나온다. 물론, 주주와 이사회 결정에 더이상 맡겨둘 수 없을 정도로 중대한 문제가 있음을 당국이 입증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이미 금융당국은 금융회사 경영인 해임을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금융기관 검사 및 제재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금융기관의 사회적 명성에 중대한 손상이 발생하는 등 사회적 물의를 야기하거나 금융기관의 건전한 운영을 크게 저해함으로써 당해 금융기관의 경영을 심히 위태롭게 하거나 당해 금융기관 또는 금융거래자 등에게 중대한 재산상의 손실을 초래한 경우' 금융회사 임원에 대해 해임을 요구할 수 있다.

      정해진 법률과 절차에 맞춰 해임 권고 수준의 징계를 내리면 지금 같은 '관치금융' 소문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여러 번에 걸쳐 심도 있는 논의 끝에 만장일치로 중징계를 내렸다'라는 구차한 덧붙임도 의미가 사라진다. 

      이렇다보니 세간에선 해임을 권고하기엔 여론 눈총이 부담스럽거나, 혹은 법정 다툼까지 완주할 역량ㆍ배짱이 부족한 게 아니겠느냐는 비아냥이 나온다. 내부통제와 관련해 자본시장법 개정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금융당국이 우회적 압박이라는 '손쉬운 길'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란 평가도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제대로 돌아가길 바란다면 금융 당국은 시간이 다소 필요해도 명확한 근거를 들어 징계하고, 법률 체계를 갖춰 시장을 관리·감독하는 데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내려진 징계에 대해서 대상이 불복한다면 법정에서 다투면 된다.  

      금융권에서는 이미 주요 금융지주 지배구조가 순차적으로 물갈이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농협금융지주 회장이 비공개 선정 절차를 통해 공무원 출신으로 결정됐고, BNK금융지주도 6명의 회장 후보군을 비공개하기로 했다. 정부 혹은 금융당국의 입맛에 맞는 인사가 발탁될 거란 분위기가 짙다.

      어떻게 매듭이 지어지건 이번 정부 들어 당국과 금융회사가 힘겨루기를 했고, 몇몇이 등 떠밀려 자리를 내놨다는 인상은 뚜렷하게 남을 전망이다. 언제가 정권이 또 바뀔 거라는 점을 감안하면 금융 선진화와 감독을 책임져야 하는 당국이 잠재적인 지배구조 불안을 심어놓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