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회사서 20조 빌렸더니…빛바랜 '삼성전자' 다시 꺼내든 회사채 시장
입력 2023.02.17 07:00
    취재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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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국내 회사채 발행이 정점으로 향하던 10년 전, 대형증권사 채권자본시장(DCM) 부서의 한 임원은 이런 얘길 꺼냈다.

      "한국 회사채 시장이 더 커져야 해요. 기업의 조달 측면뿐 아니라 주식 외 투자상품 시장이 더 커질 수 있고, 그래야 금융시장 전반이 성장할 수 있어요. 이게 잘 안되는 건 조 단위로 발행할 수 있는 기업이 많지 않기 때문이에요. 애플 보세요. 거의 20년만에 초대규모 회사채 발행을 하니 시장 전체가 열광하잖아요. 지금 삼성전자가 나서기만 하면 자본시장은 비약적으로 성장할 겁니다"

      이때가 애플이 한 번에 170억 달러라는, 우리로선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했을 때다. 달러 표시 채권으로는 종전 스위스 제약사 로슈가 2009년에 165억 달러어치 발행한 기록을 깼다. 이전까지 애플의 회사채 발행은 1996년이 마지막이었다. 주주에 대한 대규모 현금 환원을 위해 자금이 필요해지자 회사채 시장의 문을 두드렸고, 시장은 열광했다.

      지금이야 한국 회사채 시장에서도 LG화학, SK하이닉스 등 조 단위 발행이 등장하긴 했지만 여전히 그 규모나 수는 턱없이 부족하다. 국내 대기업들이 해외에서 조 단위 발행을 하는 것에 비하면(물론 현지 통화 조달 목적이 주이긴 하지만) 국내 투자자들은 그런 기회조차 없다는, 상대적 박탈감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렇다보니 10년 전 당시, 삼성전자의 회사채 발행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본격적으로 대규모 투자를 늘릴 때라 단순 기대감이 아닌, 현실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의견들도 있었다. 하지만 응답은 없었다.

      삼성전자가 마지막으로 회사채를 발행한 것은 2001년 하반기다. 8월에 5000억원, 9월에 5000억원 등 총 1조원을 조달했다. 만기는 3년, 연이자율은 5%였다. 당시 삼성전자 대표이사는 윤종용 부회장, 회사채 발행 주관사 SK증권이었고 인수사에 현대투자신탁증권, 한국투자신탁증권, 대한투자신탁증권 등은 추억의 이름들이다.

      외환위기 때인 1998년에는 네 차례의 일반사채 발행으로 1조8000억원을 회사채 시장에서 조달하기도 했다. 3년 뒤인 2001년 발행은 이들 채권 일부를 상환하기 위한 리파이낸싱이었다. 이후 삼성전자는 회사채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고 회사의 'AAA' 신용등급도 소멸됐다.

      이 얘기를 다시 꺼내는 것은 삼성전자가 이번엔 정말 국내 회사채 시장에 등장할 수 있지도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10년 전보다는 더 커졌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최근 자회사 삼성디스플레이로부터 20조원을 만기 2년6개월, 금리 4.6%의 장기차입금 형태로 차입하기로 했다. 반도체 투자금 확보 차원이다. 반도체 사이클이 하강 국면이긴 하지만, 다시 올라갈테고 글로벌 경쟁이 가열화하는 양상 속에서 투자를 줄일 수는 없을 거라는 '결단'이 깔려있다.

      삼성전자가 현금부자라고 알고 있지만, 지금 당장 통장에서 꺼낼 수 있는 현금은 많지 않은 듯하다. 되도록 차입을 하지 않는 기조를 유지하려다보니 갖고 있는 단기금융상품 등을 팔아 운전자금을 확보하는 등 자체 곳간은 계속 줄었을테다. 고정적으로 나가는 비용이 있는데다 매년 투자 규모도 50조원이 넘는다. 그러니 현금을 쥐고 있는 자회사에서 빌렸고, 또 비슷한 방식으로 해외법인을 활용할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이 역시 삼성전자의 수익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이상 한계가 있다. 삼성전자가 차입을 아예 안하는 것도 아니지만 회사 '사이즈'를 생각하면 개별 은행에서 조달할 수 있는 규모는 너무 작다. 여러모로 이득이 되는 자회사 활용 카드는 한도가 얼마 안남았다고 해외법인은 제약이 많다. 시설투자 같은 국내 투자용도라면 원화표시채권으로 발행하는 게 나을 수 있다. 회사채 시장에서 빛이 좀 바래긴 했지만 다시 '삼성전자'를 끄집어 낸 이유다.

      주식시장에서 삼성전자가 이전의 존재감을 찾는 데는 보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반면 채권시장에 다시 나타난다면 역대급 존재감을 드러내며 수많은 유동자금이 대기중인 금융시장 전체를 흔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분명 있다. 삼성전자 채권이 나오기만 한다면 웬만한 국공채보다 비싼 값에 팔릴 수 있다. 채권시장의 진짜 블랙홀이고 '찐'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재용의 삼성전자'는 이제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세대교체가 진행중인 만큼 회사의 재무전략 기조도 이전과 달리 획기적으로 바뀔 수 있다. 다양한 투자주체들에게 투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도 어찌보면 삼성전자가 사회에 기여하는 또다른 방식일 수 있다.

      증권가에서는 삼성전자가 올해 273조원의 매출과 17조원에 못미치는 영업이익을 거둘 것으로 보고 있다. 돈을 빌릴 명분은 충분하고 분위기도 마련됐다. 삼성전자가 애플처럼 회사채 시장의 주인공으로 등장할지, 또다시 묵묵부답하며 추억으로 잊혀져 갈지 지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