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 경험한 적 없는데…건설사 부도 현실화에 난감한 신탁사들
입력 2023.03.08 07:00
    터질 확률 낮지만 터지면 위험한 책준형…"2분기에 터질 수도"
    미이행 사례 전무한데…"여파 얼마나 클지 가늠 안돼"
    "대처는 가능할까? 현금은 충분할까?"…신탁사 향한 의문의 눈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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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신탁사의 '책임준공확약 관리형토지신탁(책준형)'은 2016년 처음 등장한 이후 부동산 시장의 성장과 더불어 '승승장구' 해왔다. 책준형 미준수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부동산 경기가 급격히 꺾이자 부동산 업계는 신탁사의 '위기 대응 능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여파가 얼마나 커질지 가늠도 되지 않는 상황이다.

      책준형 등장 이후 차입형 개발신탁보다 위험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책준형이 선호돼왔다.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지난해 9월 기준 신탁사의 개발사업 규모는 약 88조원으로 추정되며, 이중 책준형은 62조원으로 주를 이루고 있다. 책준형은 신용부도스와프(CDS)로 시공사가 기한 내 준공하지 못한 경우 새로운 시공사를 찾고, 발생 비용을 신탁사가 부담하는 상품이다.

      책준형은 차입형보다 위험 발생 빈도가 극히 낮지만, 문제가 터질 경우 더 위험한 것으로 분석된다. 위험 가능성이 작아 그동안 작은 자기자본으로 많은 수주가 이뤄질 수 있었다. 2021년 말 기준 책준형 사업장에 대한 PF 약정액은 자기자본 대비 최대 38배로, 사업 규모가 자기자본에 비해 큰 모습을 보인다.

      최근 시공사의 부실 위험이 커지고 있다. 계획보다 공정이 지연되는 사업장이 늘어나고 있다. 한신평에 따르면 공정률이 5%포인트 이상 차이 나는 사업장 수는 지난해 9월 116개로 2021년말 48개 대비 142% 증가했다. 전체 사업장에서의 비중도 같은 기간 18%에서 33%로 늘어났다.

      신탁사가 책준확약을 약속한 시공사가 대부분 '위험한' 중소형 건설사라는 점도 부담이다. 통상 도급 순위가 낮은 중견·중소 건설사가 부동산 PF 대출을 받을 경우 대주단은 신탁사의 책임준공확약을 요구한다. 한국기업평가에 따르면 지난해 3월 말 기준 책준형 사업에 참여한 시공사 중 도급순위 100위권 밖인 사업장 비중은 83.5%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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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는 그동안 신탁사의 책준형 미이행 사례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이다. 2016년 이후 '흥행가도'를 달려온 부동산 시장이 최근 금리 인상과 경기 침체 우려로 급격히 꺾이자, 신탁사의 대응 능력에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신탁사의 '현금 곳간'이 점차 줄어들 가능성도 제기된다. 공사 중단 후 새로운 시공사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해당 사업장의 밸류에이션은 기존 시공사가 투입한 비용의 일부밖에 인정받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투입 비용의 60% 정도로 전해진다. 이때 차액 40%는 신탁사가 채워넣어야 한다. 

      2분기에는 PF발 위기가 금융시장 전반의 리스크로 번질 수 있을 거란 전망에 업계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1분기에는 정부가 PF 시장 유동성 공급을 공식화하며 부동산 시장의 연착륙을 유도했다. 그러나 시공사 '밑단'에서 문제가 본격적으로 터지는 상황은 막지 못할 거란 시나리오도 제기된다.

      지난 1월 대우조선해양건설이 시공사로 참여하고 있는 일부 사업장이 멈췄을 때만 해도 "전체 사업장 약 600건 중 2%에 불과하다"며 큰 문제가 없을 거란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중단된 사업장의 사업규모·신탁계정대 부담수준·PF 대출 규모 등도 전체 사업장의 2% 수준이었다.

      그러나 최근 상황이 급변했다. 이미 채무불이행 상태나 도산 위기에 처한 중소형 건설사가 암암리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PF 대주단도 손실 입을 만큼 분양 경기가 꺾이면 여파가 전방위적으로 퍼질 가능성이 있다.

      책준형 미이행 사례가 없어 신탁사의 책임범위가 아직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다. 한신평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스트레스 테스트를 진행했다. 저조한 분양 성과로 신탁계정대 부실률이 높아지는 최악의 시나리오에서 산업 평균 부채비율은 84%로 상승한다. 부채비율 부담이 가장 크게 상승하는 업체는 195%까지 상승한다. 이는 차입형 신탁계정대 증가와 대손부담 확대 등에 부채비율이 상승했던 2010년, 2019년과 유사한 수준이다.

      여윤기 한신평 연구원은 "책준형 역사가 비교적 짧으며, 상품 출시 이후 장기간 우호적인 부동산 경기가 지속돼 유사시 나타날 수 있는 위험 사례 및 위험 수준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어렵다"며 "부동산 경기가 예상을 상회하는 수준으로 악화하는 경우에는 신탁사가 책임준공 의무를 미이행할 가능성도 존재하며, 이 경우 신탁사의 재무적 부담은 앞서 분석한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를 상회할 수 있다"고 밝혔다.

      우발채무 발생 위험이 커지자 시행사는 신용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은행계 신탁사를 찾는 분위기다. 기존의 신탁사를 은행계 신탁사로 바꿔달라는 요청도 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은행계 신탁사도 골머리를 앓고 있는 건 마찬가지다. 연초부터 대우조선해양건설 사업장 등 일부 사업장의 공사가 중단됐다.

      
일각에서는 지금 신탁사의 위기는 금융당국의 규제 완화가 만들어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2016년 6월 금융감독원에 책준형은 불법이라는 민원이 올라왔지만 그해 11월 금감원은 유권해석을 통해 책준형은 신탁사의 고유 업무라는 의견을 냈다. 이후 책준형이 본격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세부적인 구조가 다르기는 하지만 책준형이 크레딧을 기초 자산으로 하는 CDS라는 점에서 리먼 사태가 떠오르기도 한다"며 "문제가 터지지 않을 것처럼 책준형 사업을 키워왔는데, 시공사 부도가 연달아 일어나면 여파가 얼마나 커질지 우려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