샴페인 일찍 터뜨린 K콘텐츠…빛바랜 간판 된 'CJ ENM'
입력 2023.04.28 07:00
    Invest Col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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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국내 콘텐츠 업계에 위기감이 팽배해지고 있다고 한다. 업계 관계자들의 얘기다. 

      K팝이 빌보드차트에 오르고, K무비가 외국 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K드라마가 글로벌 OTT 상위권에 랭크되는, 과거에는 상상도 못한 일들이 이제는 일상이 돼버린 지금 이를 소비하는 우리들은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콘텐츠 업계는 작금의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다"는 거다. 콘텐츠 제작자들이 이른바 '한류병'에 빠지면서 모든 콘텐츠가 '글로벌'을 지향하고 있다. 이게 역설적으로 한국 콘텐츠의 다양성이 사라지는 결과를 만들고 있다는 거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에 할리우드식 북미 콘텐츠 제작방식이 자리를 잡으면서 북미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확률은 높아졌지만 이 방식이 공식화하면서 투자 성향 역시 획일적으로 자리를 잡았다"며 "할리우드식에 어울리지 않는 콘텐츠는 이전보다 더 투자를 받기가 어려워졌는데 이는 로컬 문화가 사라지고 한국인 배우가 한국어로 연기하는 미국식 콘텐츠만 양산하는 꼴"이라고 설명했다.

      단순히 드라마, 영화 콘텐츠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사전 작업 또는 모티브가 되는 시나리오, 웹소설, 웹툰 시장에도 같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당사자는 억울할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 단초를 제공한 것은 'CJ'라고 업계 관계자들은 한 목소리를 낸다. 아카데미 트로피를 손에 쥐는 등 해외 성과에 재미를 본 CJ가 국내 투자는 최소화하고 봉준호·박찬욱 감독처럼 해외에서 검증된 성공 보증수표가 된 감독 작품들에만 거액을 투자하고 엔데버 같은 해외 제작사로 돈을 벌겠다는 것.

      CJ가 그렇게 하면 다른 제작사들도 그걸 다 따라가게 된다. 다양성 보단 외연 확장에만 신경 쓴 작품에 투자하는 악순환의 기조에 빠지게 된다. "이제 글로벌 성공이 아니면, 국내 흥행에도 크게 고무되지 않는 분위기인데 현장에 오래 있었던 사람들 사이에선 사실 실소를 자아내는 상황"이라고 자조적인 분위기가 나온다.

      다같이 국내 플랫폼을 위한 제작보단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등 글로벌 OTT에 배급할 작품에 치중되는 분위기다. 그리고 한 편의 영화보단 양을 채울 수 있는 드라마를 선호한다. 올해 극장가에서 한국 영화는 자취를 감추고 <슬램덩크>, <스즈메의 문단속> 등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득세를 하고, 한국의 흥행 작품들은 죄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시리즈 드라마인 것도 같은 배경이다.

      또다른 문제는 콘텐츠 시장에서 큰 존재감을 갖고 있던 CJ ENM이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가 밖에서뿐만 아니라, 내부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연초 대대적인 조직개편과 오디션 순위조작으로 징역형을 받은 PD의 엠넷 재입사 등으로 시끄럽다. 몇몇 예능은 타문화 몰이해로 뭇매를 맞기도 하고, 한 때 CJ 간판 드라마의 공장이었던 스튜디오드래곤도 예전의 명성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CJ ENM 다수의 PD들이 다른 방송국, 제작사로 떠났고, 남아있는 스타 PD들도 산하 레이블로 이동했다. 예전엔 CJ 출신들이 다른 곳으로 다 잘갔는데 이젠 그럴 사람들은 하나도 안남았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구창근 대표가 재무 문제 해결의 구원투수로 등판했지만 말 그대로 재무 문제에만 치중하고, 콘텐츠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내부 목소리도 있다. 그룹 차원에서도 CJ ENM이 이전보다 주목도에서 벗어난 거 아니냐는 의견이다.

      그렇다고 해서 CJ ENM의 재무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다. 결국엔 투자한 것의 결과물이 나와야 하는데 그럴 기미가 마땅히 보이지 않는다. 한 때 40만원이 넘었던 주가는 7만원대로 역대급으로 낮다. 증권가에선 CJ ENM의 1분기 실적이 시장 기대치를 밑도는 실적을 낼 것이라며 목표주가를 내리기 시작했다. 우선 5월4일에 있을 1분기 실적 컨퍼런스콜에서 투자자들에게 충분한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콘텐츠 시장 전방위에 씨앗을 뿌리며 글로벌 토탈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던 CJ ENM은 이젠 '될놈될(될 놈은 된다)'에만 투자를 하고 그러면서 그 존재감도 점점 퇴색되는 분위기다.

      넷플릭스는 4년간 3조3000억원을 한국에 투자하기로 하면서 한국 콘텐츠 시장에서의 주도권을 확실히 쥐려고 한다. 콘텐츠 제작 시스템이 종속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자체 OTT인 티빙의 활용도는 점차 약해지고, CJ마저 넷플릭스 등 글로벌 OTT용 작품에 매진할 수밖에 없게 된다.

      물론 이 모든 게 CJ ENM의 탓만은 아니다. 어찌보면 투자사, 제작사, OTT의 콜라보레이션이 만들어 낸 '망작'이라고 보는 게 더 적합하겠다.

      이전에 전 세계에서 인기가 있었던 한국의 콘텐츠들은 시나리오가 탄탄하고 기획과 제작에 상당한 공을 들인, 말 그대로 양질의 콘텐츠였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 이후 극장 문이 닫히고 새롭게 판을 연 OTT는 자신들만의 '오리지널'을 채우는 게 중요했고 당연히도 '질'보단 '양'으로 승부를 걸어야 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빨리빨리'와 '대충대충'이 섞인 한국의 콘텐츠가 양산되는 시스템을 공고히 하게 됐다. 이는 영화나 시리즈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보니 K콘텐츠는 지금이 고점이라는 콘텐츠 업계의 냉정한 평가 속에서 다들 CJ ENM이 잘 되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CJ ENM이 한때 양질을 모두 갖춘 경험이 있는 이 시장의 첨병이자 대장이기 때문이다. 지금 K콘텐츠 거품이 터지는 게 시장의 자정작용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