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전쟁(Chip War)' 새로운 라운드 시작된 동아시아
입력 2023.05.24 07:00
    취재노트
    • (그래픽=윤수민 기자) 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지난해 11월 출간된 '반도체 전쟁: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을 위한 싸움(Chip War:The Fight for the World’s Most Critical Technology)', 이른바 '칩워'는 전 세계 주목을 받았고 올 5월엔 한국에도 번역본이 출간됐다. 저자인 크리스 밀러 미국 터프츠대 플레처스쿨 국제사 교수는 정치사학적으로 반도체 산업이 글로벌 패권 경쟁에서 주요 역할을 해왔다고 분석했다.

      이 책에선 일본을 시작으로 대만, 한국, 중국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과 의미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그리고 책 결말 이후의 전쟁 스토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오히려 칩워의 새로운 라운드가 동아시아에서 시작되는 분위기다.

      미국의 중국 견제 효과는 일본이 톡톡히 보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21년부터 반도체 산업 육성에 주력해왔는데 글로벌 정치 환경 변화 덕에 속도가 붙고 있다.

      전 세계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주자들이 모두 일본에 투자하며 거점을 만들고 있다. 세계 1위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업체 대만 TSMC는 구마모토현과 이바라키현에 반도체 생산과 개발 거점을 짓고 있다. 미국 마이크론은 향후 수년간 최대 5000억엔을 투자해 차세대 반도체를 생산하겠다고 밝혔다. 삼성전자와 미국의 인텔, 어플라이드머티리얼스도 일본 내 시설 투자와 인력 채용 계획을 발표했다. 이렇게 되면 일본은 파운드리는 물론 D램, 후공정, 패키징 최고 기업들을 유치하게 되고 기존에 있던 낸드와 자동차용 반도체까지 더해 모든 종류의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전쟁 가능성이 언제든 열려있는 상황에서 대만이 타격을 받으면 전 세계 반도체 공급은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고, 가장 큰 피해자는 미국이 된다. 한국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있지만, 역시나 중국과 지척인 게 현실이다. 미 해군이 주둔하고 있는 일본은 상대적으로 직접 타격 가능성에선 벗어나 있다. 이번 투자 유치건들도 사실 미국 정부가 일본을 공개적으로 밀어주고 있다는 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지난 19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개막한 주요 7국(G7) 정상회의는 일본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자리가 됐다. 자의든 타의든 일본은 반도체 중흥기에 대한 기대감에 들떠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일본이 대만과 한국의 자리를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그만큼 반도체 공급망에서 다시 주요한 자리에 오를 기회를 잡은 것도 사실이다.

      중국도 질세라 반격에 나섰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중국 기업에 첨단 반도체 제조장비 수출을 사실상 금지시킨데 이어 12월엔 중국의 최대 메모리반도체 업체인 YMTC 등 36개 중국 기업을 수출 통제 명단에 올렸다. 참고 참던 중국은 미국 반도체 기업인 마이크론에 대한 제재를 발표했다.

      중국 국가인터넷정보판공실 산하 인터넷안보심사판공실(CAC)은 22일 "마이크론 제품에는 비교적 심각한 네트워크 보안 문제가 존재해 중국의 핵심 정보 인프라 공급망에 중대한 안보 위험을 초래하고 국가안보에 영향을 준다"며 "인터넷 안보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이어 "법률에 따라 중요한 정보 시설 운영자는 마이크론의 제품 구매를 중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CAC는 지난달 국가안보상의 이유를 들어 마이크론 제품에 대한 사이버 안보 심사를 실시했는데 한 달여간의 조사를 벌인 끝에 이날 '불합격' 결론을 내렸다. 중국이 외국계 반도체 회사에 대해 사이버 안보 심사를 벌인 것은 마이크론이 처음이다. 발표 시점이 중국을 견제하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채택한 G7 정상회의가 끝난 직후라는 점에서 다분히 미국을 겨냥했다는 평가다. 중국의 조치에 미국도 강하게 반발하며 갈등의 골은 더 깊어지고 있다.

      미국이 일본과 손 잡고 중국을 궁지로 몰아놓고, 거기에 중국이 지지 않고 맞불을 놓으면서 좌불안석인 건 한국 반도체기업들이다. 미중 갈등이 심해질수록 중국에 공장도 있고 매출도 상당 부분 차지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입장에선 누군가를 선택해야 하는,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커졌다.

      외신들은 중국은 마이크론 제품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통해 대체할 수 있다고 판단, 이렇게 밀어붙였다고 보고 있다. 여기에 미국 정부는 마이크론 제재에 따른 부족분을 한국 기업들이 채우면 안된다고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 낸드플래시 공장이, 쑤저우엔 패키징 공장이 있다. 그리고 미국엔 텍사스 오스틴에 파운드리 공장이 있고 테일러에도 파운드리 공장을 지을 예정이다. SK하이닉스는 다롄에 낸드플래시 공장, 충칭에 패키징 공장, 우시엔 D램과 8인치 파운드리 공장이 있다. 미국엔 패키징 공장을 지을 계획이다. 갈등의 대상, 양쪽에 발을 다 대놓은 격이다.

      밀러 교수는 전자 산업 전반에서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의미 있게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하며 중국을 배제한 새로운 공급망 구축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어차피 미국 상무부가 발표한 반도체법 '가드레일' 조항 세부안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 정부의 보조금을 받을 경우 향후 10년간 중국 내 생산시설의 반도체 생산능력을 5% 이상 확장할 수 없게 된다. 대중(對中) 기술 규제와 중국 내 경제정책에 대한 불확실성 탓에 글로벌 기업들은 중국 생산 의존도를 낮출 것인만큼 국내 기업은 물론 한국 정부가 탈중(脫中) 공급망에 중심에 서야 한다는 얘기한다.

      국내 기업들은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마음처럼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라고 얘기한다. 경쟁 상대는 TSMC뿐만이 아니다. 미국의 자국 중심주의와도 싸워야 하고, 혹시나 모를 일본의 재부상도 견제해야 한다. 아직까진 물건을 팔아야 하는 ‘시장’이면서 스스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중국은 말할 것도 없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종용받는 것은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갖는 존재감이 크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만큼 파고가 높기에 이들 기업이 마주친 불안감도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