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배터리 라이벌들의 '전주(錢主)' 된 현대차
입력 2023.05.26 13:52
    한국 배터리기업과 美공장 투자키로
    SK온에 직접 2조 빌려주기로 해
    "쌓인 현금 배터리 투자가 현실적"
    • 현대자동차그룹이 국내 대표 배터리 기업들에 대해 잇따라 굵직굵직한 투자 건들을 내놓고 있다. 배터리 기업들의 투자 규모 증가, 그에 따른 여신 확보와 재무 부담 확대 이슈가 계속 나오는 와중에 현대차가 사실상 이들 라이벌 기업의 '전주(錢主)'로 나서는 모양새다.

      25일 SK이노베이션은 현대차와 기아가 배터리 자회사 SK온에 각각 1조2000억원, 8000억원 등 총 2조원을 빌려주기로 했다고 공시했다. 해당 차입에 대한 채무보증은 SK이노베이션이 선다. 보증 기간은 오는 7월부터 2028년 9월까지지만 실제 인출 일정에 따라 변경할 수 있다.

      SK이노베이션은 "SK온이 다양한 재원 확보 방법을 통해 자금 조달의 안정성을 제고하고, 고객사는 배터리셀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전략적 파트너십을 강화하는 등 시너지 효과가 기대된다"고 밝혔다.

      SK온이 이번에 차입한 자금은 현대차그룹과 함께 추진하는 북미 합작법인(JV) 투자에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그룹과 SK온은 총 6조5000억원을 투자해 오는 2025년 하반기 가동 목표로 미국 조지아주 바토우 카운티에 연간 35기가와트시(GWh) 규모의 전기차 배터리셀을 생산할 수 있는 합작공장을 설립할 계획이다. 현대차그룹과 SK온이 투자 총액의 50%를 절반씩 부담하고, 나머지 50%는 JV의 차입으로 조달한다.

      26일엔 현대차그룹과 LG에너지솔루션이 이사회를 각각 열고 북미 전기차 배터리 공급을 위한 배터리 생산 JV를 설립하기로 의결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합작 공장은 현대차그룹이 2025년 완공을 목표로 건설 중인 전기차 전용 공장(HMGMA)이 위치한 미국 조지아주 서배너 브라이언 카운티에 들어선다. 생산 규모는 약 30기가와트시(GWh)로, 고성능 순수 전기차 약 30만대를 생산할 수 있는 양이다.

      예상 투자 금액은 오는 2028년까지 6년간 5조7000억원 규모다. SK온과 마찬가지로 현대차그룹과 LG에너지솔루션이 투자 총액의 절반을 50%씩 출자하고, 나머지 절반은 JV의 차입으로 마련한다.

      현대차그룹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한국 배터리기업들의 전주(錢主)가 됐고, 재무적으로 부담이 가중되고 있는 배터리 기업들은 JV를 통해 투자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게 됐다.

      한동안 자금 유치에 어려움을 겪었던 SK온은 지난해부터 장기 재무적투자자(FI) 유치를 추진해 왔다. 모회사의 투자까지 더해지면서 당초 목표했던 투자조달 규모 4조원을 넘어서는 자금을 모으게 됐고 거기에 더해 현대차그룹의 자금 지원도 받게 됐다. 합작법인 형태의 투자를 통해서 투자 부담도 덜면서도 미국에서의 확실한 매출처를 확보하게 됐다.

      LG에너지솔루션은 최근 차입금이 빠르게 늘어나는 것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커지는 와중이었다. 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전기차 배터리 관련 대규모 설비투자로 인해 차입금 레버리지 비율이 상승할 것으로 예상한다"며 LG화학과 LG에너지솔루션의 신용등급(BBB+)의 전망을 '긍정적'에서 '안정적'으로 조정하기도 했다. 역시나 현대차그룹과의 합작법인 투자로 투자 부담을 다소 줄일 수 있게 됐다.

      5월 넷째주에 현대차그룹이 한국 배터리 기업에 약속한 투자금과 빌려준 자금만 해도 8조원이 넘는다. 그럴만도 한 게 현대차그룹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현금을 갖고 있다. 3월말 연결기준 현대차는 34조원, 기아는 20조원의 현금성자산을 갖고 있다. 내부에서도 "현금이 너무 많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를 정도"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현대차 입장에선 나쁠 게 없는 '투자'다. 전기차 만드는 비용의 상당 부분을 배터리가 차지한다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다. 배터리 경쟁사들에 투자하면서 확실한 물량 제공을 담보받을 수 있는 동시에 직접 공장 투자를 한 주주라는 입장과 더불어 양사를 '핸들링'함으로써 배터리 가격 협상력도 높일 수 있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현대차는 배터리 내재화에 끊임없이 도전하겠지만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며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현금을 보축해야 하는 것도 맞지만, 투자를 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도저도 아닌 신사업에 투자하는 것보단 배터리에 투자하는 것이 현 시점에선 가장 실용적인 투자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그리고 자동차 시장과 배터리 시장에서 싸워야 할 대상이 다변화, 급변화하는 상황에서 국내 기업들간의 협력은 여러모로 긍정적이라는 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