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장에 오일머니 앞다퉈 몰려드는 이유는?
입력 2023.06.07 07:00
    올해 UAE 40조 투자 MOU, 실행 논의 본격화
    사우디·카타르도 한국 유망 산업 투자 관심
    중동 자금, 석유 다음 먹거리 찾기에 분주
    오일 머니 파워에 아시아 시장에까지 시선
    한국 시장 기대 크지만…섣부른 기대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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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중동 투자자들이 한국 시장에 몰려들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아랍에미리트(UAE) 방문 이후 양국의 투자유치 협의가 점차 가시화하고 있고, 사우디아라비아의 한국 투자 행보도 분주하다. 오일머니의 힘이 강할 때 미리 자국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기술과 사업을 찾기 위한 모습이다. 투자처를 넓힐 필요성이 커진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투자처인 한국이 주목받은 것으로 풀이된다.

      1월 한국-UAE 정상회담 후 UAE가 한국에 300억달러(약 40조원) 규모 투자를 집행하기로 하는 양해각서(MOU)가 체결됐다. 지난달 기획재정부가 주관한 포럼에선 300억달러 중 20억달러를 우선 투자유치 하는 안이 논의됐다. 에너지·정보 통신 기술·농업 기술·생명공학·항공우주·K컬처 등 6가지 분야가 우선 투자처로 꼽혔다.

      이달 정부는 기업과 지방자치단체들이 UAE에 투자를 요청할 창구도 만들겠다고 했다. 공공 부문은 기재부 금융투자지원단, 민간은 산업은행의 UAE 투자협력센터가 맡는 ‘투트랙 체제’다. 창구에서 투자 요청안을 검토한 후 UAE 측에 전달하는 방식이다.

      UAE는 아부다비, 두바이 등 7개 토후국(土侯國)이 연합한 국가다. 석유가 나지 않는 두바이는 금융 허브 등 개발, 오일머니를 등에 업은 아부다비는 투자에 공을 들여 왔다. 우리나라와 투자 협력도 무바달라, 아부다비투자청(ADIA), 아부다비개발지주회사(ADQ), 아부다비투자위원회(ADIC) 등을 앞세운 아부다비가 주도한다.

      UAE와 한국의 국가 차원 투자 협의는 올해 들어 본격화했지만 민간 시장에서의 움직임은 이전에도 있었다. 무바달라는 2017년 넥센타이어에 168억원을 투자했고, 작년엔 GS그룹 등과 손잡고 휴젤을 인수했다. 이 외 다른 바이오 기업과 투자 협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국내 사모펀드(PEF) IMM인베스트먼트는 UAE의 농업기술 스타트업 ‘퓨어하베스트’에 대규모 투자를 집행해 왔다.

      사우디아라비아도 한국 시장에 관심이 많다.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PIF)와 투자부(MISA)가 전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작년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한국을 찾아 한국 기업과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한국 기업들은 ‘네옴시티’ 사업에 참여할 기회를 찾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게임과 엔터테인먼트에 주목하고 있다. 투자부는 위메이드와 게임·블록체인 사업 협력을 위한 MOU를 체결했고, PIF는 카카오엔터테인먼트에 투자했다. PIF는 엔씨소프트와 일본에 상장해 있는 넥슨의 지분을 각각 9%가량 보유하고 있다.

      사우디 관광청은 카카오그룹과 IT 인프라 구축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지난달엔 서울에서 ‘관광 로드쇼’를 개최하기도 했다. 에쓰오일의 대주주인 사우디아라비아 국영석유기업 아람코는 한국에서 적극적으로 투자처를 찾고 있다. 한국에 상주하는 담당자들이 투자 프로젝트를 제안받아 본사에 올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외에 카타르투자청(QIA)은 SK온에 투자하기로 했다.

      중동 국가들의 오랜 고민은 석유산업 다음 먹거리를 찾는 것이다. 오일머니는 무한하지 않기 때문에 여유가 있을 때 여러 산업과 기술에 투자하려는 분위기다.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 에너지 가격이 오르는 상황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단순히 수익 창출에 그치지 않고, 건설·인프라·의료·IT 등 현지로 가져가 접목시킬 수 있는 기업과 기술에 투자하려는 의지가 강하다는 평가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석유와 천연가스 가격 상승에 힘입어 중동 국부펀드의 자산과 투자규모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작년 중동 국부펀드의 자산 규모는 3조8979억달러로 전년보다 7.6% 늘었다. 자산이 일정 규모 이상으로 늘어나면 가능한 모든 영역으로 자금을 뿌릴 필요성이 커진다. 중동 자금은 지금까지 미국와 유럽 등 선진 시장의 기업과 부동산에 주목했지만 이제는 아시아로도 눈을 돌리는 분위기다.

      한 외국계 투자사 관계자는 “자산 규모가 커질수록 좁은 영역에서 높은 수익을 내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투자처의 외연을 확장할 수밖에 없다”며 “중동에 유동성이 풍부해지면서 한국 등 아시아에도 투자하려는 움직임이 잦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아시아에서도 한국의 매력도는 높다. 중국과 인도에 비해선 사회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고, 일본보다는 역동적인 시장이다. ‘K컬처’ 효과로 인지도와 신뢰도가 높아지기도 했다. 한국의 어플리케이션만 수집하는 곳이 있을 정도로 한국의 ‘아이디어’는 해외 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유동성의 힘이 줄면서 한국 기업들도 힘이 많이 빠졌다. 대신 중동 자금 입장에선 그만큼 상대적으로 낮은 가치로 투자를 노려볼 수 있다.

      시장에서는 중동 자금을 활용하기 위한 고민이 이어지고 있다. 올해 들어 중동 전문가를 찾는 기업과 자문사들의 행보가 분주했다. 골치 아픈 산업 구조조정에 중동 자금을 활용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온다. 무바달라가 산업은행을 통해 PEF와 벤처캐피탈(VC) 등에 자금을 출자할 것이란 예상도 이어지고 있다.

      여러 장밋빛 청사진이 나오는 가운데 먼저 앞서갈 이유는 없다는 지적도 있다. 이제 논의를 구체화해가고 있을 뿐 명확한 그림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의사 결정 과정이 복잡하고, 일처리가 더딘 중동 특유의 문화를 우려하기도 한다. 실제 투자를 유치하는 과정이 녹록지 않을 것이란 지적이다.

      한 자문사 임원은 “지금 투자처로 거론되는 영역들은 중동 자금이 관심을 가질만한 곳”이라면서도 “화제성을 모으기 위해 접촉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보지만 성격 까다로운 중동 자금을 실제로 유치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PEF 운용사 임원은 “무바달라가 산업은행을 통해 출자에 나설 것이란 예상이 있는데 아직 구체적으로 나온 것은 없다”고 말했다. 한 자문사 임원은 “기업들이 중동 자금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지만 당장 가시화하는 것은 없다 보니 지금은 문의가 뜸해졌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