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 작년 엘리엇에 724억 비밀 지급…소액주주들 “개미만 호구냐” 부글
입력 2023.06.29 07:00|수정 2023.06.29 10:30
    매수가격 개별 합의 어려웠던 소액주주들 성토
    상법상 제도 외 보호방안 모호…역차별 지적도
    삼성 배상 요구, 이론상 가능해도 현실성 낮아
    '부당 관여' 인정…국가 상대로 소송이 현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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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삼성물산이 작년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 비밀합의를 통해 724억원을 지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발생한 손실을 개별 합의로 보상받은 것인데, 이 소식에 합병 당시 삼성물산 주주들은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경영권 승계 목적으로 추진된 거래 때문에 입은 손실을 삼성물산이 나몰라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외 투자자 역차별이란 지적도 나온다.

      삼성물산 소액주주들이 엘리엇 사례를 토대로 정부, 나아가 삼성그룹을 상대로 집단 손해배상 소송에 나설 수 있느냐가 관심사다. 다만 당시 상법에서 보장하는 권리(주식매수청구권, 합병무효 소송)를 행사하지 않았다면 이제 와서 권리를 주장하기 쉽지 않다. 국내외 법정에서 정부 책임이 어느 정도 인정된 만큼 국가에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편이 가장 현실적이고 효율성이 클 것으로 보인다.

      엘리엇은 2018년 한국 정부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개입해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봤다며 국제투자분쟁(ISDS)에 나섰다. 삼성물산 주주로서 불리하게 산정된 합병비율(1대 0.35, 제일모직 대 삼성물산)을 문제삼았다. 지난 20일 중재 판정부는 우리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약 690억원)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배상원금에 이자를 감안한 배상금액은 1300억원에 달한다.

      엘리엇은 이 외에도 삼성물산으로부터 별도로 돈을 받았다. 중재 당사자들이 판정부에 제출한 문서에 따르면 엘리엇은 2016년 삼성물산과 비밀합의를 맺었고, 주식매수청구가격 조정 소송도 취하했다. 작년 대법원은 다른 삼성물산 주주들의 주식매수가격 결정 청구에 삼성물산이 합병 당시 제시한 매수가격(주당 5만7234원)이 낮다며, 6만6602원이 적당하다고 판결했다. 엘리엇은 대법원 판결이 나온 후 과거 보유주식에 매수가격 차액을 적용한 금액을 삼성물산으로부터 지급받았다.

      상법은 합병을 반대하는 주주에 여러 보호 장치를 두고 있다. 반대 주주는 회사에 "주식을 사달라"고 요구할 권리(주식매수청구권)를 갖는다. 주식매수 가액은 주주와 회사간 협의에 의해 결정한다고 규정한다. 아울러 주주는 합병무효의 소를 제기해 합병의 당위성을 다툴 수 있다. 상법이 주주들에 부여하는 권리를 활용한 것으로 넓게 본다면, 엘리엇과 삼성물산의 합의 자체는 크게 문제삼기 어려울 수 있다.

      엘리엇과 소액주주의 형평성 문제는 제기될 수 있다. 삼성물산이 제시한 금액에 주식을 판 주주들은, 별도 합의를 통해 회사로부터 추가 자금을 받은 엘리엇보다 손에 쥔 자금이 적기 때문이다. 반면 엘리엇은 명확한 수치로 드러나는 ‘차액’을 챙기고도, 여전히 손해가 있다고 주장해 한국 정부로부터 배상금을 받게 됐다. 중요 정보를 알리지 않은 삼성물산의 공시 의무 위반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주주게시판이나 토론방에선 "삼성물산이 공시의무를 위반한 것 아니냐" "소액주주들한테도 똑같이 배상해달라" "결국 개미들만 손해봤다" “자진상폐하라” “개미만 호구” 등 소액주주들의 날선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거래에서 소액주주와 연기금이 손해를 봤는데도 책임지는 이가 없다거나, 삼성물산과 정부가 국내 투자자를 해외 투자자에 비해 ‘역차별’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소액주주들이 엘리엇처럼 적극적으로 배상 요구에 나설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합병이 불만이라면 보장된 권리 안에서 해결하라는 것이 상법의 취지다. 당시 별다른 매수가격 합의 없이 회사가 제시하는 가격대로 주식을 팔았다면 이제 와서 그 가격의 부당함을 제기하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소액주주들이 엘리엇만큼의 협상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던 것이 현실이다 보니, 궁극적으론 상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시된다.

      합병무효 소송 역시 이미 물건너간 카드다. 이 소송은 합병 등기일로부터 6개월 안에 제기해야 하는데,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은 이미 2015년 9월 마무리됐다. 작년엔 일성신약 등 합병 당시 주주들이 합병무효 소송을 취하했다. 이 소송의 1심에선 주주들이 패소한 바 있다.

      소액주주가 삼성물산, 정부와 국민연금 등의 불법행위를 문제삼아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정부와 삼성그룹 측이 불법행위로 주주들에 손해를 끼친 것으로 인정된다면, 해당 당사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는 이론적으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일뿐 수행하기 쉽다는 것은 아니다.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기한(소멸시효, 안 날로부터 3년 및 발생일로부터 10년)도 무한하지 않다. 삼성그룹이 합병을 추진한 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주주는 손해배상청구권이 사라졌을 수 있다.

      한 상법 전문가는 일반론을 전제로 “상법에 주식매수청구권이나 합병 무효소송 등 규정을 둔 것은 그것을 활용하라는 취지인데, 당시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면 이제 와서 주장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며 “민법상 불법행위를 주장하려 해도 합병 당사자들이 사기에 준하는 행위를 했다는 점이 인정돼야 하는데 가능할 것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재용 회장과 삼성그룹-박근혜 전 대통령-정부와 국민연금-주식 투자자로 이어지는 구도에서는 주주가 이재용 회장과 삼성그룹에까지 책임을 묻기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평가다. 국내 법원과 해외 중재에서 ‘우리 정부의 부당한 개입’이 인정됐기 때문에, 국가에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편이 현실적일 수 있다. 국가배상청구권도 소멸시효(안 날부터 3년, 불법행위가 있은 날부터 5년)를 고려해야 한다.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진행 중이다.

      2020년 삼성물산 소액주주들은 정부의 부당한 개입으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됐고, 이로 인해 손해를 봤다며 정부 상대로 9억원가량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상법상 보장된 권리를 활용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삼성물산을 당사자로 끌고 오기 어렵다는 판단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심 재판부는 지난해 11월 ‘보건복지부 장관의 직권남용과 주주들의 손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고, 주주들은 항소했다.

      해당 소송에서 삼성물산 주주들을 대리하는 김광중 한결 변호사는 “우리 법원과 삼성물산과 합의를 했음에도 엘리엇에 여전히 손해가 있다고 판단한 중재 판정부의 시각차가 크다”며 “그렇다보니 국내 투자자들에 대한 역차별이란 비판이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