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TSMC·인텔·애플은 '반도체 전쟁' 준비하는데…'조직 신설' 발표하는 삼성전자?
입력 2023.08.14 07:00
    AI 시장서 돈 쓸어담는 엔비디아…전 세계 영토확장 드라이브 건 TSMC
    인텔은 '파운드리 독립성' 준비…퀄컴 연합 RISC-V로 脫 ARM
    격동기에 내놓는 삼성전자의 메시지는 불명확하고 모호한 문구들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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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글로벌 반도체 산업은 가히 '전쟁(Chip War)'이라 불릴 정도의 격동기를 맞이하는 중이다. 

      인공지능(AI) 알고리듬과 같은 새 소프트웨어의 출현은 '무어의 법칙'으로 대변됐던 반도체 개발 속도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자금력을 갖춘 반도체 기업들은 쏟아질 수요에 대비하고자 ARM과 TSMC를 통해 자사 수요에 맞는 칩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미국과 EU의 주요 국가들은 반도체 회사들 유치하는 데 사활을 걸고 수십조원에 달하는 보조금을 선뜻 내놓고 있다. 반도체 패권 확보가 고스란히 세계 경제와 외교ㆍ안보 등 각 분야 패권을 좌우하는 핵심요인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가장 넓은 격전지를 보유한 곳은 '종합반도체회사'(IDM) 삼성전자다. 

      그러나 '기술력 우위'를 제외하고 나면, 삼성전자 반도체의 미래 전략과 방향성은 의외로 그리 뚜렷하지 못하다. 그간 이재용 회장과 계열 부문 대표들이 내놓은 메시지들 대부분은 추상적이고, 모호하며, 구체적이지 못했다.

      엔비디아 "우리 AI 반도체가 미래 지배한다"…숫자로 증명되는 비전

      "컴퓨팅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로켓을 추진하는 엔진이 가속 컴퓨팅이라면 연료는 AI다. LLM이나 추천 알고리듬과 같은 AI 모델이 디지털 경제를 좌우할 것" (2022년 9월, 젠슨 황 엔비디아 CEO)

      엔비디아는 이미 글로벌 AI 반도체 영토의 80% 이상을 점유했다. 챗GPT 수준 생성형 AI를 확보하자면 대당 6000만원을 호가하는 엔비디아의 H100과 같은 반도체 수천장, 수만장으로 서버를 가득 채우는 방법 외 대안이 없다. 글로벌 빅테크는 앞다퉈 엔비디아 GPU를 사들이고, 엔비디아는 돈을 쓸어 담고 있다. 올 1분기 매출 감소에도 시장 전망치를 웃도는 20억4000만달러(원화 약 2조7000억원) 순이익을 거뒀다. 2분기엔 사상 최대 분기 실적이 예상된다. 

      이어 H100을 이을 차세대 AI 반도체까지 내놨다. 엔비디아는 8일(현지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시그래프 2023'에서 'GH200 그레이스 호퍼 슈퍼칩'을 내년 2분기 양산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생성형 AI 시장을 독점한 H100과 같은 GPU와 141기가바이트 최첨단 메모리 및 72코어 ARM 기반 프로세서(CPU)가 결합된 제품이다.  "이전 모델보다 더 강력하고 원하는 거의 모든 LLM을 활용, 미친 듯이 추론할 수 있다"라는 선언이 곁들여졌다.   

      엔비디아의 강점은 기술력뿐 아니라 '주도권' 확보 전략에서도 두드러진다. 구글 딥마인드나 테슬라 자율주행, 오픈AI의 GPT 등 기술 변곡점마다 시장 트렌드를 콕 집어냈다. 창업자인 젠슨 황은 거의 매번 직접 나서 미래 방향성과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시장을 선도할 맞춤형 칩을 발표하고 있다. 

      TSMC, "美·日 이어 獨에도 공장 세운다"…부동의 글로벌 '1위' 파운드리 

      "로버트 보쉬, 인피니언, NXP와 '유럽반도체 제조회사(ESMC)' 합작법인을 설립해 독일 드레스덴에 110억달러(원화 약 14조4000억원)를 투자해 반도체 공장을 건설한다" (2023년 8월, TSMC 공동성명) 

      시장 절반을 거머쥔 글로벌 1위 파운드리 TSMC는 가장 발 빠르게 영토를 확장하고 있다. 2020년, 일본 요코하마에 초미세공정기술을 개발하는 법인을 설립한 데 이어 2021년 12월엔 구마모토에 28·22나노, 16·12나노 공정 기반 생산법인을 세워 내년부터 양산에 들어갈 예정이다. 

      지난 연말엔 당초 120억달러(원화 약 15조7000억원)으로 계획했던 미국 애리조나 생산법인 투자 규모를 400억달러(원화 약 52조6000억원)로 늘려 공장을 더 짓기로 했다. 애리조나 팹은 내년부터 2026년까지 순차로 양산에 돌입한다.

      이번에 발표한 독일 드레스덴 투자는 유럽 최대 차량용 반도체 기업과 JV를 꾸리는 형태다. 독일 정부는 200억유로(한화 약 29조원) 지원책을 마련했는데, 절반 이상이 TSMC를 향할 것으로 예상된다. 

      TSMC의 공격적인 확장 정책은 여러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미ㆍ중 갈등 한복판에 자리한 리스크를 해소하고자 TSMC를 글로벌 첨단제조 생태계의 운명과 직결되게 만들겠다 ▲반도체 수요자들은 물론, 각국 정부와도 혈맹 수준의 관계를 만들어 대체 불가능한 지위를 확보하겠다 ▲이를 통해 삼성전자든, 인텔이든 파운드리 부문의 경쟁사가 아예 따라올 수 없는 우위를 이어가겠다 등으로 해석된다.

      TSMC의 설립자인 모리스 창이 지난 4일(현지시각) 뉴욕타임스(NYT) 인터뷰에서 내놓은 발언은 상징성이 크다. 그는 한·미·일·대만 반도체 동맹 '칩 4'와 ASML이 있는 네덜란드를 언급하며 "우리는 모든 급소(choke points)를 통제하고 있다"며 "급소를 쥐려 한다면 중국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라는 도발적인 발언을 내놨다. 미국의 대중국 견제, 그리고  미국이 그리는 반도체 생태계에 대한 확신과 지지를 선언한 셈이다. 

      인텔, "아시아에 빼앗긴 반도체 되찾자면 경쟁력 필요"…IDM 2.0 고심 한창

      "우리는 반도체 산업을 아시아에 빼앗겼다. 이를 되찾으려면 경쟁력을 더 키워야 한다" (2023년 5월, 팻 겔싱어 인텔 CEO) 

      "인텔은 파운드리 부문을 독립적 형태로 운영할 계획이다. 직접 손익을 관리하는 조직으로 인텔 'IDM 2.0' 방향성을 명확히 하겠다" (2023년 6월, 데이브 잔스너 인텔 CFO)

      반도체 미세 공정 경쟁에서 '낙오자'로 찍혔던 인텔도 위기감을 드러내며 파운드리 산업 재기를 노리고 있다. 2021년 3월 IDM 2.0을 내걸며 파운드리 시장에 재진입한 데 이어 현재 설계와 위탁생산 부문을 분리하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과거 CPU 시장에서의 독점적 지위가 무너지고 있는 터에 파운드리 부문에서 TSMC의 대안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IDM 2.0 전략은 2025년까지 미세공정에서 TSMC를 따라잡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인텔도 아직까지 삼성전자에 이은 3위, 추격자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인텔은 벼랑 끝에 몰려 있다는 '절실함', 그리고 반도체 전쟁을 주도하는 미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라는 무기를 갖고 있다.  

      빅테크 반도체 직접 진출 롤모델 된 '애플실리콘'…대안 마련 들어간 반도체연합

      "애플, ARM 기반 신형 'M3맥스' 칩 탑재한 맥북 이르면 10월 출시 예정…TSMC 3나노 공정서 생산" (2023년 8월, 블룸버그 보도) 

      "퀄컴·NXP·로버트 보쉬·인피니언·노르딕 세미컨덕터 RISC-V(리스크파이브) 기반 반도체 회사 공동 투자"

      애플은 M1 칩을 시작으로 고성능 비메모리 반도체 설계에서 독보적 입지를 구축했다. ARM과 TSMC를 활용해 인텔의 몰락을 이끌어냈고, 이제는 세계를 지배하는 자사 제품들에 꼭 맞는 '애플실리콘'을 창조해냈다. 이어 새 시장의 주역이 될 XR 기기 '비전프로'를 발표했고, 이를 보조할 신형 센서 R1을 내놓았다. 오는 10월엔 새 애플실리콘인 M3를 선보일 예정이다. 

      퀄컴은 지난 4일(현지시각) 반도체 연합을 구축해 RISK-V 기반 반도체 회사에 공동 투자를 결정했다. 퀄컴 역시 ARM 설계 자산을 활용하고 있지만 대안에 직접 투자하면서 ARM 종속에서 탈피해 경쟁 우위를 회복하기 위한 복안으로 풀이된다. 

      삼성전자, 격동기 한복판에서 대응 전략·방향성 모호

      삼성전자도 격변하는 시장에 대응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지난 2019년부터 신경망처리장치(NPU)에 집중하며 AI 반도체 전략을 세운 바 있다. 그해 6월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했는데,  "2030년까지 NPU 분야 인력을 2,000명 규모로 10배 이상 확대하고 ‘차세대 NPU 기술’ 강화를 위해 전사적인 역량을 집중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삼성의 기대(?)와 달리, AI반도체 리더십은 엔비디아 '패밀리'에 주도권이 넘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삼성전자에 기대되는 주가 상승 포인트는 최근 엔비디아가 발표한 차세대 슈퍼칩에 삼성전자가 고대역폭메모리 HBM3e를 제공할 것이냐는 점이 꼽힌다. 이마저도 하이닉스가 엔비디아에 HBM3를 먼저 납품했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사업에 대한 비전이나 기술도 여러 차례 제시해왔다. 2019년엔 여러 국제포럼을 개최하며 "자동차, 컨슈머, 네트워크 반도체 등 다양한 응용처에서 저전력 FD-SOI, RF(무선통신), 임베디드 메모리와 같은 특화된 공정을 활용하는 유럽지역 고객들을 위해 폭넓은 파운드리 솔루션을 제공하겠다"는 비전을 내놨다. 올해 5월에도 텔아비브컨벤션 센터의 이스라엘 최대 반도체 행사 ‘ChipEx 2023’에 참여, ‘Foundry All Around'라는 주제로 3나노 GAA 공정을 포함, 높은 성능과 에너지 효율을 갖춘 반도체를 구현할 수 있는 기술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술력과 무관하게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사업의 근본적인 난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종합 반도체 회사인 삼성전자는 고객사인 애플ㆍ인텔ㆍ퀄컴ㆍ엔비디아와 직접적인 경쟁자다. 고객들의 핵심부품을 속속 들여다볼 수 있는 가능성이 제거되지 않는 한 '새 클라이언트' 유치가 어렵다. 

      한때 반도체 시장의 '제왕'으로 군림하다가 PCㆍ서버 시장에만 머물러 패권을 뺏긴 이른바 '관료화된 공룡' 인텔보다도 대응이 느린 상황이다.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접근법이나 구체적인 미래 전략이 뚜렷이 제시되지 않은 상황. 이 와중에 지난 수년간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대표들과 이재용 회장이 내놓은 주요 메시지들은 아래와 같다. 모호하고, 시(詩)적이며, 선언적이다. 

      "3년 내 유의미한 M&A 실현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2021년 1월, 최윤호 전 삼성전자 경영기획실장) 

      "커스터마이징된 (갤럭시) AP 개발을 고민해 보겠다" (2022년 4월, 노태문 MX사업부문장)

      "미래 기술에 우리 생존이 달려 있다. 첫째도 기술, 둘째도 기술, 셋째도 기술" (2022년 6월, 이재용 삼성전자 당시 부회장)

      "퀄컴, 구글과 함께 차세대 확장현실(XR) 경험을 만들어 모바일의 미래에 다시 한번 변화를 가져오겠다"(2023년 2월, 노태문 MX사업부문장) 

      "성별과 국적을 불문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인재를 모셔 오고, 양성해야 한다. 세상에 없는 기술에 투자해야 한다” (2022년 10월, 이재용 회장 사장단 간담회)

      최근 삼성전자가 보인 행보는 디바이스경험(DX) 부문 하 미래기술사무국 신설이다. 다만 삼성전자에는 미래기술사무국 이전에 그룹 전반 사업을 관장하는 사업지원 TF 조직이 존재해왔다. M&A부터 신사업까지 삼성전자의 장기 전략을 담당하는 컨트롤타워로 불렸다. 

      삼성전자는 오는 10월 5일 미국 실리콘 밸리에서 '시스템LSI 테크데이'를 개최, 시스템반도체 신(新) 비전' 을 발표한다. 지금까지 공개된 메시지는 '인간과 가까운 반도체', '휴머노이드', 그리고 "AMD와 GPU 협력강화' 등으로 요약되고 있다. 한진만 삼성전자 DS(반도체)부문 미주총괄(DSA) 부사장, 박용인 시스템LSI사업부장(사장) 등이 참석하는데 기조연설 주제는 '눈앞에 다가온 세미콘 휴머노이드'다.

      시장의 반응은 냉랭하다. 

      투자업계 최고위 관계자는 "지난 5년 간 삼성전자는 매번 IR이나 공식선상에서 유의미한, 사이즈가 있는 M&A를 하겠다라고 발표한 게 여러 번인데 결과는 한 건도 없었고, 검토한다라는 말만 해왔다"라며 "경영진으로서 제시할 메시지가 없다고 보인다"라고 논평했다. 

      컨설팅업계 관계자는 "애플, 테슬라,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 TSMC 등 빅테크가 깜짝 발표를 하면 뒤늦게 삼성전자가 '우리도 할 것'이라고 공수표를 내는 사례가 매번 누적되고 있다"라며 "오너가 누구를 만났고, 얼마를 투자해 몇명을 고용하겠다는 등 '통큰 결단' 외엔 회사가 내세울 수 있는 뉴스거리가 없어 보인다는 얘기가 업계에 회자한지 한참 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스마트폰 시장에서 '패스트 팔로워' 전략으로 성공한 삼성전자는 '미래비전 제시'에서도 여전히 패스트 팔로워에 그치고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