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들엔 '미전실'이 다시 필요하다?
입력 2023.08.24 07:00
    삼성, 미전실 폐지 이후 톱니바퀴 안돌아
    유능한 CEO+특정 산업 전문성이 트렌드
    산업군 넓은 그룹들은 컨트롤타워 불가피
    오너 불확실성보다 CEO 집단지성이 리스크 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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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국민 여러분께서 부정적인 인식이 있으시면 없애겠다"

      지난 2016년 12월6일, 국회에서 열린 '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위 청문회에서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은 미래전략실(이하 미전실)의 폐지를 공식 발표했다. 미전실은 이듬해 2월 폐지됐다.

      이 순간이 삼성그룹의 미래를 바꿨다고 했도 과언이 아니다. '정경유착 단절'의 의의는 충분히 있겠지만, 그 순간부터 삼성의 여러 톱니바퀴들은 헛돌기 시작했다. 오너 경영인의 장기간 부재 속에 각 계열사들은 각자도생을 해야했고, 전자와 비(非)전자 사이는 이제 남남만 못한 존재가 됐다. 지금 같은 위기의 순간에 쓸 수 없는 카드는 자승자박의 결과다.

      7년전 골칫덩어리로 전락했던 이 조직이 재조명 받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삼성을 포함해 산업군이 펼쳐져 있는 그룹들은 '그들만의 미전실'이 어느 때보다 필요해졌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더 어려워진 경영 환경에서 앞길을 조금이라도 밝힐 '컨트롤타워' 말이다.

      미전실의 전신은 이병철 선대 회장 비서실과 삼성 구조조정 본부로 삼성의 역사와 함께 했다. 미전실은 삼성전자 소속이었지만 그룹 전체의 경영기획·인사·재무를 총괄하는 핵심 조직이었다. 계열사 감사 및 경영진단도 담당했다.

      삼성은 오너 경영인이 구상한 경영방침을 미전실과 전문경영진이 뒷받침하는 경영 방식을 취해왔다. 글로벌 스탠다드라고 할 수 있는 이사회 중심 경영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연관성이 떨어지는 산업군을 가진 그룹 입장에선 불가피한 '최상'의 경영 방식이었다는 평이다. 오너 경영인이 그룹의 일거수 일투족에 다 관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재계 관계자는 "같은 그룹이라고 해도 컨트롤타워가 없으면 다른 산업군의 최고경영자(CEO)들이 사실상 교류할 일이 없어 서로의 생각을 알기가 어렵다. 또 그룹 차원에서 어떤 사안이 우선적이고 오너 경영인이 어떤 비전을 갖고 있는지도 알 수 없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며 "모든 그룹에 해당되는 얘긴 아니지만, 영위산업군이 다양한 그룹들은 이런 조직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전했다.

      한편에선 지주사가 그 역할을 하면 되지 않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국내 대기업 상당수는 지주사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쉽지 않다.

      모기업 지주사 관계자는 "주력 사업 계열사 입장에선 '지주사는 그들의 배당으로 먹고 사는 회사'라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 있어 애초부터 상하관계가 구축되기 어렵고, 계열사마다 이사회가 있는 상황에서 지주사가 관여한다는 건 주주들을 설득시킬 수 없다"며 "법인 밖에 있는 특수조직이 아니고서야 계열사 전체를 아우르긴 어렵다"고 말했다.

      현 상황에선 SK그룹의 수펙스(SUPEX)추구협의회가 그나마 '이상적'인 모델로 평가 받는다. 주요 계열사 CEO들로 구성된 수펙스추구협의회는 그룹의 최고 의사결정 협의체다. 각 계열사의 경영 활동은 각사 이사회에서 진행하고 그룹 차원의 전략적 검토가 필요한 사안은 수펙스에서 논의하는 방식이다.

      SK그룹의 사업 포트폴리오는 IT와 에너지라는 두 축의 카테고리를 중심으로 신사업을 확장하는 방식인데 서로 다른 산업이 시너지를 내는 건 실상 불가능하다. 수펙스 체제도 문제가 없진 않겠지만 계열사 간 불필요한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그룹 차원의 투자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는 것만으로도 현 시점에선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삼성은 미전실 폐지 이후 전자TF, 물산TF, 금융TF로 서로 다른 산업군의 태스크포스(TF) 체제로 돌아가고 있다. 이재용 회장의 운신 폭은 여전히 넓지 못하고 컨트롤타워가 없다보니 TF들은 따로 놀고 서로의 접점은 사라지고 있다.

      시장에선 컨트롤타워가 필요해 보이는 몇몇 그룹을 지목하는데 그 중 하나가 롯데그룹이다. 롯데는 유통과 화학이라는 다소 거리가 먼 산업군이 그룹의 두 축인데 지금 둘 다 흔들리고 있다. 그 과정에서 승계 작업도 시작되면서 트랙레코드를 위한 소재, 바이오 등 신사업 투자도 시작됐는데 다소 늦었다는 평을 받는다. 시장에선 과거 정책본부, 국제실 같은 그룹 컨트롤타워가 있었을 때와 크게 비교된다고 언급한다.

      CJ도 비슷한 처지다. 과거 지속적인 확장으로 그룹의 몸집을 키울 땐 식품과 물류, 콘텐츠를 그룹의 3개 축으로 강조했다. 지금 그 시너지를 기대하긴 어려워 보이고 각 계열사들이 처한 상황도 긍정적이지 않다. 역시나 승계 작업을 앞두고 있는 만큼 그룹의 효율성을 끌어올릴 컨트롤타워의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한화도 비슷한 상황에 놓일 거라는 전망이다. 현재로선 김승연 회장의 자녀들이 각각의 산업군을 맡게 돼 큰 문제가 없어보이지만, 김동관 부회장이 담당하고 있는 산업군은 날로 넓어지고 있다. 김 부회장은 방산과 친환경에너지를 큰 축으로 하는 사업 구조 재편을 어느 정도 매듭졌고 로봇, 2차전지 제조장비 등 신사업으로 넓히고 있다.

      아무리 유능한 오너 경영인이라 하더라도 모든 산업을 아우른다는 건 불가능하다. 글로벌 톱티어 기업 대부분은 유능한 CEO와 특정 산업의 공고한 시장지배력의 결합을 바탕으로 한다. 특히나 우리 대기업들은 과도기를 지나고 있다. 경제성장기의 문어발식 확장 전략은 진작에 생명을 다했고, 경영권이 '세습'되는 과정에서 그룹은 하나둘 쪼개지면서 특정 산업을 영위하는 그룹들로 재탄생하고 있다. 지금 같은 불확실성이 높아진 시대에서 몸집이 한결 가벼워지고 전문성을 갖추게 되면 그 장점이 드러난다.

      LG그룹은 과거라면 이런 고민을 크게 했어야 할 수 있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구광모 회장 이후 LG전자는 전장 쪽으로, LG화학은 배터리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큰 줄기에서 접점이 생겼다. 계열분리도 지속적으로 해 왔기 때문에 이전의 '보수적 경영'이라는 이미지도 조금씩 옅어지는 분위기다. 현대자동차그룹은 '모빌리티'라는 큰 카테고리 안에서 각 계열사의 연관성이 높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룹 컨트롤타워의 필요성이 적다는 평가다. 정의선 회장의 '카리스마'도 항상 회자된다. 포스코와 KT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회장들이 '안위'가 걱정되는 등 정치적 외풍에 흔들리지만 최근 의사결정과 시장 변화의 적응 속도는 웬만한 대기업보다 빨라졌다는 평을 듣고 있다.

      기업 자문을 담당하는 금융업계 관계자는 "지금 잘 나가고 있거나 잘 버티고 있는 기업들의 특징이라면 카리스마를 가진 오너 경영인이 확고한 경영 철학을 바탕으로 신속하게 투자를 결정하고 주주들을 설득을 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거나, 그게 가능한 시스템을 갖춘 특정 산업에 시장지배력이 있는 기업 정도"라며 "오너 경영인만을 믿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에 최고경영진들의 집단지성을 믿는 게 좀 더 현실적일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룹의 컨트롤타워는 조선 중기 왜구와 여진의 빈번한 침범에 신속 대응하기 위해 관계 고위직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한 임시 조직 '비변사(備邊司)'와 궤가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조직의 당위성이 변질되면서 여러 문제점을 야기하는 것도 닮았다. 그럼에도 몇몇 그룹들은 이 임시조직이 필요하다고 한다.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은데 안팎의 경쟁상대들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위기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을 때까진 톱니바퀴가 맞닿아 돌아갈 수 있는 '운영의 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