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ML 팔고 ARM 산 삼성전자
입력 2023.09.07 07:00
    英 ARM, 美 나스닥 '72조' IPO 추진…삼성전자도 투자
    ASML과 함께 업계 양대 '공용자산' 격…몸값은 비싼데
    후공정·파트너십 중요성 부상하며 전략적 가치 엇갈려
    삼성전자, 후공정 무게 싣고 파트너십 확대 위한 행보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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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삼성전자가 2분기 ASML 지분 일부를 매각해 약 3조원의 현금을 확보한 데 이어 나스닥 상장을 앞둔 ARM에 투자할 예정이다. 공정 경쟁의 초점이 첨단 패키징과 같은 후공정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반도체 IP(설계자산)를 둘러싼 진영 구축·관계 관리의 중요성이 부상하는 데 따른 대응으로 풀이된다.  

      5일(현지시각) 영국 ARM은 최대 545억달러(원화 약 72조5000억원) 규모 기업 가치를 목표로 나스닥 상장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ARM은 이번 공모를 통해 희망가 상단 기준 약 48억7000만달러(원화 약 6조5000억원)를 조달할 계획이다. 

      ARM 공시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AMD, 애플, 구글, 인텔 등 10개 글로벌 IT 기업이 이번 공모에 초석투자사(Cornerstone Investors)로 참여할 예정이다. 초석투자사들은 최대 7억3500만달러(약 1조원) 규모 ARM 주식을 공모가에 인수할 예정이다. 

      삼성전자만 떼놓고 보자면 네덜란드 ASML 지분을 매각해 확보한 자금 일부를 ARM 지분에 투자하는 구도다. 삼성전자는 지난 2분기 ASML 지분 약 0.9%를 매각해 약 3조원가량 현금을 확보한 바 있다. 6월말 기준 삼성전자 보유 ASML 잔여 지분은 약 0.7%로 장부가 기준 2조6010억원 규모다.  

      삼성전자의 이 같은 행보는 올 들어 반도체 경쟁 구도가 가파르게 변화하고 있는 데 대한 대응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셀 라이브러리나 설계 블록 등 IP를 공급하는 ARM이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단독 공급하는 ASML이나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의 공용 자산에 비유된다. ARM IP는 갈수록 작아지는 칩 안에 서로 다른 반도체를 집적하기 위한 설계자산으로, ASML 장비는 그렇게 만들어진 미세 설계도를 칩 안에 그려넣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단순한 지분 투자 가치로만 따지면 삼성전자가 ASML 대신 ARM에 투자할 실익은 불투명하다. ARM이 점점 커지는 IP 시장에서 40% 이상 점유율을 유지하면서 로열티 수익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지만 연간 매출액은 4조원에 미치지 못한다. 이번 공모에서 제시한 기업 가치는 주가매출액비율(PSR) 기준 약 20배 이상으로 글로벌 빅 테크·플랫폼 기업의 수배에 달하는 프리미엄이 반영돼 있다. 실제 벌어들이는 돈에 비하면 비싸다는 얘기다. 

      그러나 전략적 가치는 엇갈리고 있다. 

      ASML 장비는 여전히 회로 선폭 미세화 등 전공정 경쟁의 유일한 대책이지만 2.5차원 패키징과 같은 후공정 경쟁에서 파운드리(위탁생산) 승패가 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TSMC·삼성전자·인텔과 같은 파운드리가 ASML에서 더 많은 EUV 노광장비를 확보하기 위해 열을 쏟기보단 후공정에 직접 진출할 필요가 커진 셈이다. 

      TSMC의 경우 지난 2021년 3사 중 가장 선제적으로 서로 다른 칩을 위로 쌓아 올리기 위한 후공정 투자를 본격화하며 현재 첨단 패키징 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있다. 엔비디아 그래픽카드(GPU)와 SK하이닉스의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인공지능(AI) 반도체로 묶어주는 CoWoS 공정이 대표적이다. 삼성전자와 인텔도 2022년부터 후공정 투자를 늘리며 관련 기술을 확보했지만 시장 점유율은 10%에 미치지 못한다. 

      ARM은 파트너십 측면에서라도 삼성전자가 지분을 확보해야 할 필요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된다. ARM 역시 반도체 설계 경쟁에서 프로세서(연산처리용) IP보단 칩 간 데이터 처리 효율 등을 담당하는 인터페이스 IP 중요성이 부상하며 위상 자체가 크게 치솟는다고 보긴 힘들다는 평이 많다. 그러나 여전히 애플을 위시한 팹리스·고객사 전반이 ARM IP를 기반으로 칩을 설계하고 있는 데다 파운드리는 물론 메모리 사업에서도 고객사 확보가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국내 비메모리 반도체 생태계가 대만 시장에 비해 취약한 만큼 TSMC와의 경쟁을 이어가자면 IP 부문에서 파트너십 구축이 필수적이기도 하다. 이번 ARM 초석투자사에는 글로벌 2·3위 IP 전문 기업인 시놉시스, 케이던스도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EUV 노광장비로 7나노미터(nm) 이하 선단공정 시대가 열리면서 웨이퍼당 생산 단가는 폭등했는데 성능 개선은 기대만 못해 비용 효율이 바닥으로 떨어졌다"라며 "삼성전자도 업황이 부진한 가운데 ASML 지분을 팔아 확보한 자금 대부분을 후공정에 투자할 것으로 보이는데, ARM 투자의 경우 파트너십 확대 차원에서 빠질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