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은행 문 두드리는 기업들…팔 벌려 환영하는 은행들
입력 2023.09.14 07:00
    기업들, 금리 상승에 회사채 등 직접금융 조달 축소 분위기
    기업대출 위한 은행 네트워크 재개…IPO서도 물밑 접촉
    "당장은 문제 없다고 해도…여러 가능성 열어두자는 것"
    금융지주도 은행 위주 기업금융 영업 전략 확대 방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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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국내 기업들이 다시 은행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통상 회사채 발행이 어려운 중소기업의 대출뿐만 아니라 회사채 발행이 어려워진 대기업도 은행 대출 의존도를 높이고 있는 상황이다. 고금리가 이어지면서 직접금융 조달 환경이 이전보다 악화된데다 시장 불확실성이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만큼 확실한 '파이프라인'이 필요하다는 판단이다.

      이에 금융지주사들도 기업금융을 핵심 먹거리로 판단하고 자본·부채성 자금 조달 전 분야에서 은행 계열사들의 영업을 확대하고 있다. 다만 일부 은행들이 기업대출 점유율을 경쟁적으로 늘리는 과정에서 중소기업의 부실자산까지 떠안아, 장기적으로는 건전성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지난 7월 기준으로 연 4.4%대였던 신용등급 AA- 기업의 3년물 회사채 금리가 8월 기준으로 연 4.569%까지 올랐다. 올해 하반기에도 국내 기준금리는 인하보다는 동결 또는 상승 기조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아 회사채 금리 역시 상승세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고금리 상황이 지속되자 국내 기업들은 회사채나 기업어음(CP) 발행 같은 직접금융시장 대신 은행 대출로 선회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통상 은행 대출금리는 회사채 금리보다 높아 대기업에서 선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절대적인 회사채 발행금리가 크게 오른 상황에서 대기업 계열사들마저 신용등급 하향 기조가 짙어지면서 은행에서 단기로 돈을 빌리려는 움직임이 확대된 것이다. 

      실제로 회사채 시장은 지난 4월부터 8월까지 순상환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순상환 규모는 8월 기준으로 1조8500억원에 달했다.

      같은 기간 기업대출 규모는 꾸준히 확대됐다. 지난 8월 기준 5대 시중은행의 기업대출 잔액은 747조4895억원으로, 전월 대비 8조원 이상 증가했다. 대기업 대출은 3조원, 중소기업 대출은 5조원 이상 늘었다. 기업대출은 올해 상반기 총 43조8000억원가량 늘었고, 매달 3조~7조원 이상 증가세를 유지 중이다. 

      기업들은 은행 네트워크를 재개하며 금융지주사와의 소통을 강화하고 있다. 

      삼성ㆍSKㆍ현대차ㆍLG 등 4대 그룹은 작년 말부터 인사에서 재무 전문가들을 요직에 중용하고, 금융지주와 지분교환을 통해 ‘혈맹’을 구축하는 등 전사적으로 손을 잡기 시작했다. 일례로 SK그룹은 하나금융과 4000억원대 지분을 맞교환하고, SK온ㆍSK이노베이션 등 계열사들의 단기차입금을 하나은행으로 조달하고 있다. 

      한 증권사 기업금융본부장은 "현금이 넉넉한 '빅이슈어' 현대차도 올 하반기에 회사채 만기 물량에 대응해야 하는데 금리 메리트가 없어 차라리 론(대출)으로 돌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며 "이런 분위기에 증권사들은 DCM(채권자본시장)보단 ECM(주식자본시장)에서 활로를 찾고 있고, 은행들은 계열 한도가 남아 있는 그룹사들을 중심으로 대출 영업에 나선 상태다"라고 말했다. 

      은행 계열의 기업대출 확대 기조는 증권사 ECM 핵심 사업인 IPO(기업공개) 부문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 상장 주관사를 찾는 기업들 사이에서 은행 계열사를 보유한 증권사를 선호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특히 규모가 큰 거래일수록 크레딧 라인(자체 차입 한도)을 열어줄 수 있는 금융지주 계열 증권사를 선호하고 있다. 

      한 증권사 IPO담당 임원은 "시장에서 역량을 인정 받은 '빅 하우스'들이 최근 주관사 경쟁에서 탈락하고 있는데, 이는 기업대출 한도가 큰 은행을 가진 금융지주에 밀린 것"이라며 "은행들이 노골적으로 '크레딧 라인을 열어주는 대신 계열 증권사를 써달라'는 식의 영업을 하는 분위기인데, 결국 증권사의 트랙레코드보단 뒷배인 은행의 자금력이 결정하는 분위기"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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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기업들이 은행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은행들도 기존 주수익원이었던 가계대출 대신 기업대출에 힘을 싣고 있다. 마침 금융당국이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등 가계대출 증가 여부를 예의주시하면서, 은행 역시 가계대출 성장을 적극 꾀할 수 없는 분위기와 맞물렸다. 

      하나은행과 우리은행이 가장 공격적 영업 기조를 보이고 있다. 하나은행의 올해 상반기 기업 대출 잔액은 지난해 말(144조8284억원) 대비 7.4% 늘어난 155조5689억원으로, 4대 시중은행 중 가장 높은 성장세를 기록했다. 작년까지 4대 은행 중 최하위 규모였으나, 최근 신한은행을 제치며 3위로 올라섰다.  

      KB국민은행에 밀려 2위를 기록하고 있는 우리은행도 '4년 후 1위 탈환'을 목표로 대기업 대출 확대에 적극적인 모습이다. 우리은행 기업금융 관계자는 "주채권은행으로서 경쟁사들이 갖지 못한 정보를 충분히 가지고 있고, 이를 활용해 여신을 강화할 것"이라며 "최근 2차전지와 방산 등을 중심으로 대기업 여신 수요가 늘어나고 있어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은행 간 기업대출 경쟁 심화는 대출금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지난 7월 5대 시중은행이 제공한 중소기업 신용대출 평균 금리는 6.57%로, 올해 초 대비 200bp(1bp=0.01%포인트)에서 최대 400bp 이상 감소했다. 

      기업금융 1위를 차지하기 위해 중소기업 대출금리까지 인하하는 과당 경쟁이 벌어지면서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현재 은행들은 대외 수출이 지속 감소하고 있는 시장 상황상 기업의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움에도 경쟁적으로 대출을 늘리고 있다. 결국 경기 침체기엔 은행들이 이 같은 부실자산을 대거 인수해야 하는데, 당장의 실적 달성을 위해 건전성 관리를 포기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하나은행이 올해 들어 기업여신을 공격적으로 늘리는데 그중 절반가량은 중소기업 대출로 파악된다"며 "상대적으로 비은행 포트폴리오가 약한 하나금융이 은행부터라도 먼저 경쟁에 뛰어들겠다는 의도로 풀이되는데 부실 자산이 많아지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다른 금융권 관계자도 "가계대출을 둘러싼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선 기업대출을 확대하는 것이 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면서도 "실적을 쌓아야 하지만 안정성까지 있는 차주는 한정적이기 때문에, 무리한 자산 확장은 시간차를 두고 부실 위험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