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경쟁 우려해 은행채 한도 푼 금융당국…부동산 PF 부실 위험 키우나
입력 2023.09.26 07:00
    작년 수신 경쟁에 고금리 예적금 대거 출시했던 은행들
    1년 만기 해지 시점 돌아와…100조원대 머니무브 가능성
    다시 수신전쟁 시작될라…금감원, 자제령에 밀착 점검
    은행채 확대 방향으로 선회하나…PF 부실 풍선효과 우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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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작년 하반기 은행들이 수신을 늘리기 위해 고금리 예적금을 대거 출시했던 청구서가 돌아오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 몰린 5%대의 고금리 수신자금 약 100조원의 만기가 올해 10월부터 시작되는 까닭이다.

      시중은행들이 자금 재유치를 위해 연이자 4%대의 특판 상품을 출시하며 수신경쟁을 시작하려는 조짐을 보이자, 금융 당국은 '자제령'을 내리면서 은행채 발행 물량을 늘리도록 유도하고 있다. 

      문제는 은행채 확대가 채권시장 전체에 가져올 파급 효과다. 초우량물인 은행채가 시중 자금을 빨아들여 회사채 시장을 경색시키고, 나아가 제2금융권을 중심으로 한 부동산PF 기업어음(PF ABCP) 등의 상환을 어렵게 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9월부터 올해 2월까지 은행권에서 증가한 수신 잔액은 총 111조4612억원으로 집계됐다. 통상 은행의 예적금이 1년 만기임을 감안한다면, 은행들이 오는 10월부터 총 100조원이 넘는 현금을 고객에게 상환해줘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지난해 하반기 ‘레고랜드 사태’로 은행들이 채권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워지자, 무작정 금리를 높여 수신을 유치해 유동성을 확보했던 청구서가 돌아온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지난해 말 기준으로 5대 시중은행(KB국민ㆍ신한ㆍ하나ㆍ우리ㆍNH농협) 예금 상품의 평균 금리는 4.95%에 달했다. 같은 기간 국내 저축은행들의 1년 만기 예금 평균 금리도 5.53%를 기록, 6%에 육박했다. 

      해당 상품들의 만기가 돌아오자, 은행들은 다시 수신 경쟁에 불을 붙이려고 시도하고 있다. 5대 시중은행의 정기예금 최고금리는 4%에 근접한 3.9%로, 저축은행과 상호금융권에선 연 6%대의 예적금 특판도 쏟아지는 상황이다. 

      과거 금융 당국이 팬데믹 시절 85%까지 낮췄던 은행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규제를 올해 100%까지 올린 것도 은행권들의 고금리 수신 경쟁을 격화시키고 있다. 은행 입장에선 저원가성 예금을 포기하더라도 유동성을 늘려야 하니 4~5%짜리 고금리 특판 상품을 대거 출시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수신 경쟁이 '출혈 경쟁'으로 번질 우려가 보이자, 결국 금융 당국이 나섰다. 금융감독원이 시중은행의 자금 담당 부행장들을 대상으로 수신 경쟁을 자제하라고 당부하면서, ‘밀착 점검’까지 선언한 것이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최근 주재한 점검회의에서 "작년 4분기 취급된 고금리 예금의 재유치 경쟁이 장단기 조달 및 대출금리 상승 우려 등 불필요한 시장 불안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예금ㆍ대출시장의 쏠림 현상과 여ㆍ수신경쟁 과열 여부 등을 밀착 점검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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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다만 당국은 은행들의 민원을 받아들여, 올해 4분기부터 은행채 제한을 풀어줄 계획이다. 지난해 당국은 레고랜드의 보증채무 미이행 선언으로 채권시장의 자금이 우량 채권인 은행채에 쏠리자 은행의 채권 발행을 제한한 바 있다. 

      100조원대의 상환 자금을 마련해야 하는 은행권이 '수신 유치'가 아닌 '채권 발행'으로 선회할 수 있도록 유도한 것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제한 조치 이후) 현재 분기별 만기 도래 물량의 125% 한도에서만 은행채를 발행할 수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올해 4분기 자금 조달에 부담이 있다는 은행들의 요구가 있었다"며 "은행채 발행이 줄면 은행들이 수신 쪽에서 조달을 늘리는데, 수신 경쟁이라는 부작용을 감안해 선제적으로 은행채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고 말했다. 

      문제는 은행채가 늘어날 경우 채권 시장의 불안감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근 한전채 발행이 재개되는 상황에서 은행채까지 늘어나자, 시장의 유동성이 한 곳으로만 쏠리는 까닭이다. 한전채와 은행채는 일반 회사채와 비교해 신용도가 높아, 금리 수준이 비슷할 경우 한전채와 은행채로 수요가 몰리게 된다. 

      지난달 기준 회사채 전체 발행 규모(약 19조원)에서 은행채는 약 40% 이상을 차지했다. 은행채는 지난달 총 7조9053억원이 발행됐으며, 전월(3조7253억원) 대비 90%나 늘었다. 이 과정에서 신한은행(2조8300억원), 국민은행(2조1700억원), 하나은행(1조3200억원) 등 대형 시중은행이 1조원 넘는 현금을 은행채로 조달한 것으로 집계됐다. 

      은행채 쏠림 현상이 심화되자, 금융권에서는 제2금융권을 중심으로 부동산PF 문제가 다시 떠오를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통상 은행채 발행이 늘면 시장 금리와 신용대출 금리가 모두 올라, 기업들의 자금 조달이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다. 

      중소형 건설업체에 시중 유동성이 제때 공급되지 않을 경우, 부동산PF의 부실 위험이 더욱 커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도 부동산 PF 시장 회복을 더디게 하는 원인 중 하나로 은행채와 한전채, 주택저당증권(MBS) 등 우량채권 발행물량 확대를 꼽았다. 

      실제로 지난달 기업들의 유상증자는 1824억원 가량으로, 전월 대비 절반 가량 줄었다. 같은 기간 기업어음(CP) 발행액(32조1978억원)도 8.3% 줄었다.

      다만 금감원은 부동산PF 부실 위험에 대해 선을 긋고 있다. 지난해는 레고랜드 사태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부동산PF 및 채권시장이 경색된 것일 뿐, 현재 시장 상황과는 차이가 있다는 반박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올해 7훨 만기가 도래하는 은행채가 11조8000억원 됐는데, 이를 8월과 9월에 분산시켜 6조1000억원만 발행할 수 있도록 (시장 수급 상황을) 당국이 조정하기도 했다"며 "공교롭게 가계대출 증가세와 고금리 예적금 만기 시기가 겹쳤을 뿐, 전체 금융시장 안정화라는 측면에서 (은행채 규제 해소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