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손' 국민연금·농협마저 사라졌다…악순환 빠진 회사채 시장
입력 2023.10.05 07:00
    하반기 DCM에서 '큰손' 국민연금ㆍ농협중앙회 존재감 줄어들어
    캡티브 영업 두고 시장왜곡 비판 커지자 눈치보며 빠진 국민연금
    채권 평가손실 확대에 추가 인수 어려워진 NHㆍMG 등 상호금융
    高금리에 대출 선호하는 기업들에…한전채ㆍ은행채 발행 악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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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올해 하반기 채권자본시장(DCM)에선 농협중앙회와 MG새마을금고, 국민연금 등 ‘큰손’들이 사라지면서 채권시장의 불황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올해 연말까지 일반회사채 시장이 작년과 비슷한 수준으로 침체될 것이라는 부정적 목소리가 높다. 자금 조달이 필요한 대기업들도 높은 금리 때문에 은행 대출로 선회한 상황에서, 큰손들마저 나서지 않으니 회사채 수급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지난 8월 이후 주관사들 사이에서는 회사채 시장 큰손들이 빠진 상황을 두고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6월까지 강매수세를 이어갔던 농협중앙회와 대형 운용사들이 하반기부터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국민연금 등 주요 연기금들도 회사채 수요예측 참여를 줄이고 있다.

      올해 초 농협중앙회는 3월부터 6월까지 회사채 수요예측에 대거 참여, 당시 업계 큰손으로 떠올랐다. 일부 회사채의 경우 발행 물량의 절반을 농협이 인수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때 농협을 따라 신협과 MG새마을금고 등 상호금융 회사들도 수요예측에 참여하면서, 자본시장에선 그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낮은 밸류(기업가치)의 중견기업들까지 증액 발행에 성공했다는 평가다. 

      문제는 이들이 당시 금리 인하를 기대하며 매수했던 채권들이 대거 평가손실을 기록하면서 이들의 회사채 추가 인수 여력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회사채 보유 규모가 크면 클수록 많은 자금이 채권에 묶이게 되고, 유동성 위기에 처했을 때 현금화 가능성이 떨어져 일시적인 자금부족에 직면할 수 있다.

      운용사들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월 기준으로 조합원들로부터 추가 자금이 들어오는 상호금융과 달리, 운용사는 한정된 펀드에서 채권을 매매해야 한다. 추가 채권을 인수하기 위해선 기존 보유 채권을 팔아야만 한다는 뜻이다. 

      한 증권사 기업금융 관계자는 "요즘처럼 채권 금리가 지속 상승하는 국면에선 농협과 운용사 등 주고객사들이 추가 매수를 하는 행위를 꺼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다른 운용사 관계자도 "올해 초 금리가 정점일 것이라고 판단해 회사채를 매수했는데, 금리 인하 기대감이 점점 줄어들고 최근 미국의 FOMC(연방공개시장위원회)마저 연내 금리 인하 불가능을 시사하자 매수세를 점차 줄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더해, 올해 상반기까지 우량 회사채를 포트폴리오에 적극 담았던 국민연금마저 수요예측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주관사들의 불안감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특히 국민연금은 연초 채권시장에서 만기가 3년 이하인 단기물을 집중적으로 매입하고, 금리 밴드 하단보다도 낮은 금리를 다수 써내거나 최저 금리를 제시하는 등 '고가 매수'도 서슴지 않으면서 시장의 큰손으로 떠오른 바 있다. 

      일례로 올해 1월 포스코가 회사채 3년물 2000억원 규모를 발행하기 위해 수요예측을 진행하자, 국민연금은 공모 금액의 80%에 해당하는 1600억원어치 주문을 단독으로 넣기도 했다. 

      그러나 금융 당국이 주관사들의 캡티브(captive‧계열사 내부시장) 영업에 대해 감시 수위를 높이면서, 연기금들도 당국의 눈치를 살펴 캡티브 비중이 높은 회사채를 매수하지 않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됐다. 캡티브 마켓이란 금융그룹에 속하는 증권사들이 계열 보험사나 자산운용사, 캐피탈사 등 계열사들의 수요예측 참여를 약속하며 딜 주관 수임을 따내는 방식을 의미한다. 

      최근 금융감독원은 주관사나 인수사의 수요예측 참여 관행이 회사채 시장을 왜곡시킨다고 판단, 금융투자협회를 중심으로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증권사 RM(Relationship manager)들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국이 캡티브 영업 규제 움직임을 확대하자, 국회 국정감사 피감기관인 기관 투자자들도 채권 인수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 대형증권사 DCM부서 관계자는 "은행 계열사도 아닌, 같은 증권사의 보유 재산(PI)으로 수요예측에 참여하는 일까지 성행하자 보다 못한 금감원이 칼을 빼든 상황"이라며 "문제는 채권시장 참여자들이 한정됐기 때문에, 캡티브를 아예 배제하기 어려워 대부분의 회사채가 엮여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른 회사 관계자도 "국민연금은 캡티브 수요가 극대화 된 발행사들의 채권들이 적절한 시장 금리 프리이싱을 거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라며 "이미 캡티브들이 금리를 많이 높여 놓았기 때문에, 이를 넘어서는 수준으로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공표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거들었다. 

      은행권 내 기업대출이 증가하고 있는 현상도 올해 하반기 회사채 시장 경색을 점차 가속화하고 있다. 

      최근 은행들은 레고랜드 사태 이후 조달했던 고금리 예금의 만기가 도래하자, 만기 상환을 위해 기업대출을 확대하거나 은행채 발행을 늘리고 있다. 은행채 발행 확대가 차례로 공사채나 우량 회사채, 여전채 금리를 연쇄적으로 높이면서 전반적인 회사채 수요 감소로 이어지는 상황이다. 

      결국 기업들은 회사채 발행 대신 은행대출로 넘어가고, 이는 다시 은행들의 은행채 발행 확대와 채권 시장 침체를 부추기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앞선 대형증권사 관계자는 "은행채 확대와 더불어 올해 연말 유가 인상까지 겹쳐 한전채 추가 발행도 전망된다"며 "시장이 우려하는 모든 상황이 종합선물세트처럼 합쳐서 다가오는 상황"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