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자본시장 '빌런'된 한전…정치인 사장은 전기료 올릴 수 있을까?
입력 2023.10.05 07:00
    취재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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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한국전력이 62년만에 정치인 출신 사장을 선임했다. 누적 적자 47조원, 부채 200조원, 올해도 역시 10조원에가까운 적자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4선 의원 출신이 이끄는 한국전력의 비상경영체제가 시작됐다.

      한전의 비상상황실(워룸)이 만들어진 것은 2009년. 미국발 금융위기 여파로 창사 이후 첫 적자가 나면서다.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김동철 사장은 그 당시와 같이 간이침대를 놓고 숙식하며 워룸을 재현하고 있다.

      사장이 밤낮 없이 일한다고 한전의 적자가 줄어들진 않는다. 다만 김 사장의 최근 행보는 과거 어떤 경영자들보다 한전의 상황을 확실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사실 한국전력의 부실화를 멈추기 위한 방안은 그리 많지 않다. 한전채를 무제한 찍어 연명하거나, 전기료를 올려 적자폭을 줄여나가는 방법 등이 그나마 현실적이다.

      한전은 이를 위한 명분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워룸의 재현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뼛속 깊이 새겨진 정치인 DNA에서 발현한 퍼포먼스, 즉 절체절명의 위기를 소비자들에게 설명하고, 전기료 인상을 위한 일종의 빌드업(Build-up)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전은 레고랜드 사태 이후 한국 채권시장 '교란종'으로 지목됐었다. AAA급 초우량 신용도에 5%가 넘는 금리로 투자자들을 유인했는데, 종국엔 정부가 나서 한전채를 비롯한 공사채 발행을 자제해 줄것을 요청했고, 채권 시장이 가까스로 진정세로 돌아섰다.

      한전은 6월부터 한전채 발행을 재개했다. 은행채와 더불어 공사채가 채권시장 투자자들의 수요를 흡수하기 시작하면서 채권시장엔 위기감이 감돈다. 다시금 한전채 발행이 늘어날 수 있다는 불안감은 채권시장의 여전한 뇌관이다.

      한전의 영업적자가 지속하면 채권발행 여력은 줄어든다. 이미 한도는 목전에 찬 상태. 채권발행 여력이 소진된다면 남는 방안은 전기료 인상이 유일하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한 분위기는 조금씩 마련되고 있다. 한덕수 총리는 이달 초 대정부 질문에서 "가능하다면 전력요금 조정도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전기료 인상을 시사했다.

      전기료 인상은 한전의 적자를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방안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한전은 더 강도 높은 자구안을 요구받고, 그 자구안이 얼마나 현실적이고 실효성이 있는지 꼼꼼히 평가 받아야 한다.

      한전은 올해 5월 25조7000억원 규모의 재무구조개선 자구안을 발표했다. 사상 최대규모의 고강도 혁신안이라며 주목을 받긴했지만, 부동산 매각, 고위직 성과급 반납만으로 얼마나 유의미한 효과를 이끌어 낼 수 있을진 여전히 의문의 목소리가 많다. 대표적으로 한전 자구안의 핵심으로 꼽히던 여의도 부지 매각은 변전소 이전 이슈도 해결하지 못한채 자구안에 등장했는데, 현재로선 매각 성사여부 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전기료 인상은 정치권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선거를 불과 반 년 앞둔 상황. 4선의원 정치인이 구원투수로 등장한 것도 대내외적으로 앞뒤가 꽉 막힌 상황을 풀어보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한전은 전기료 인상에 앞서 추가적인 자구안을 내놓을 가능성이 높다. 이 역시 시장의 냉정한 평가를 받을 것이고, 평가에 기반한 한전의 지원책이 나와야 한다. 다시 나올 한전의 대책들이 명분쌓기에 그치지 않기를, 정치적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