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도 패키지의 시대…외국계 IB 주춤한 틈 노리는 韓 증권사
입력 2023.10.18 07:00
    자본시장 주름잡던 외국계 IB, 점점 존재감 축소
    침체 속 국내 증권사 네트워크·자금력 우위 부각
    거래 자문서 자금지원까지 종합 역량 중요해져
    증권사 기대감에…"신뢰성 확보가 우선" 지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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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오랜 기간 한국 자본시장의 주역은 외국계 투자은행(IB)이었다. 외환위기 후에야 한국에 M&A 시장이 열렸고 이후 자본시장도 해외 시스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금융당국과 증권사들이 초대형 IB를 표방하기도 했지만 글로벌 시장은커녕 아시아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갖추기 쉽지 않았다.

      기업들은 국내외 대형 거래를 추진할 때는 항상 외국계 IB를 찾았다.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지만, 일을 그르쳤을 때 ‘왜 골드만삭스를 쓰지 않았느냐’는 비판도 피하기 위해서다. 국내 증권사가 함께 일을 맡기도 했지만 보조 역할에 그치거나 훨씬 박한 수수료를 챙기는 데 그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증권사들은 IB와 경쟁 영역에 힘을 주기 어려웠다.

      외국계 IB의 존재감은 지난 수년간 점점 줄어들었다. 랜드마크 거래에 이름을 올리더라도 예전처럼 ‘대체불가’ 느낌은 아니다. 자체 역량이 쌓인 대기업과 사모펀드(PEF)들은 IB의 도움을 받지 않거나 의사 소통의 창구 정도로 활용하기도 한다. IB의 호황기가 저물며 수많은 중추 인력들은 기업, 투자사 등으로 떠났다. 신규 충원 인력으로는 이 공백을 메우기 쉽지 않다.

      국내 대형 증권사들은 IB가 주춤한 틈을 노리고 있다. 아직 외국계 IB를 완전히 넘어섰다 보기는 어렵지만 국내 기업 관련 거래에서는 충분한 역량을 갖췄다고 저마다 자신하는 분위기다. 증권사 M&A를 통해 아시아 권역 내 존재감을 키워가는 곳도 있다. IB들은 저마다 일감을 손에 쥐고 있지만 결과를 내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올해 HMM 매각이 상징적인 예로 꼽힌다. 500억원 이상의 보수가 책정된 대형 매각 거래를 쟁쟁한 IB들을 제치고 삼성증권이 따냈다. 매각자 측이 국내 증권사를 더 선호했다는 시선도 있지만 삼성증권이 그간 대형 M&A 시장에서 존재감이 크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면 눈이 뜨일 성과다.

      한 대형 증권사 M&A 담당자는 “올해 들어 골드만삭스 등 외국계 IB들의 이름을 찾아 보기 더 어려워졌다”며 “HMM 사례가 자본시장의 무게추가 IB에서 증권사로 넘어가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국내 자본시장의 침체는 IB보다 증권사에 유리하다는 지적이다. 대기업조차 코로나 팬데믹 이전처럼 크로스보더(국경간거래) M&A를 적극 추진하기 어렵다. 해외 기업을 인수했다가 애를 먹는 기업도 적지 않다. 웬만해선 IB의 도움을 받아 해외 M&A를 나서기 부담스럽다.

      기업들은 투자보다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자산을 팔거나 지분을 나눠줘야 할 일이 늘 것으로 보인다. 소수 전문가에 의존하는 IB보다 발 넓은 증권사에 맡기는 편이 낫다. 일부 기업이 해외 시장에서 교환사채(EB)를 발행하며 IB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그런 활용 자산을 가진 대기업은 일부다.

      국내 증시 부진은 장기화하고 있다. 대어급들이 상장(IPO)에 나서긴 여전히 조심스럽고, 돈이 몰리는 곳은 일부 테마주에 국한된 분위기다. 해외 투자자들이 꼭 받쳐줘야 하는 대형 거래가 아니라면 국내 증권사로도 부족하지 않다. 많은 증권사들이 수십개씩 잠재 상장 리스트를 갖추고 시기를 조율하고 있다.

      올해 자금 시장은 긴축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올라간 금리는 좀체 내려오지 않고, 중동 전쟁 등 악재는 계속 나온다. 고금리 상황이 당분간 이어질 것이고, 이는 기업이나 투자 주체들의 부담을 키울 수밖에 없다. 거래를 따내려면 그를 뒷받침할 자금 주선 능력도 필요한 시기라는 평가다.

      이 또한 IB보다는 국내 증권사가 우위를 점할 부분이다. 단순 자문을 넘어 금융주선, 상장, 채권 발행 등 다양한 영역까지 ‘패키지’ 사업을 펼칠 수 있다. 지난 호황 속에 자본력을 갖춘 대형 증권사들이 눈독을 들일 만하다. 각종 규제 비율을 신경써야 하는 금융지주계보다 독립계 증권사가 활약하기 유리할 것이란 시선도 있다.

      올해 공개매수가 증권사의 중요 먹거리로 떠올랐다. PEF의 상장사 투자 기피 경향은 더 강화하고, 향후 의무공개매수 제도 도입 등 호재도 있다. NH투자증권은 올해 MBK파트너스 컨소시엄의 오스템임플란트, 한앤컴퍼니의 루트로닉 공개매수 업무를 맡아 자문료를 챙겼다. 이는 인수금융 전환으로 이어져 별도의 수수료와 이자를 또 챙기게 됐다. 향후 차환이나 자금 조달, 각종 회수 작업에서도 NH투자증권에 중요한 역할이 주어질 가능성이 크다. 경쟁사조차 조단위 자금을 척척 대는 결단력을 부러워한 분위기다.

      한 증권사 임원은 “외국계 IB들은 국내 증권사에 비해 파이낸싱 면에서 약점이 있다”며 “내년에는 공개매수, 인수금융, 자금 조달 및 회수 등 ‘패키지 사업’을 강화하는 데 집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국내 증권사들의 기대가 현실화할 것이라 예단하기 조심스러운 면은 있다. 국내외 부실자산에 대한 우려가 큰 상황에선 증권사가 과감한 결단을 내리기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금융지주에 속한 증권사는 그룹 차원의 지원이 가장 큰 무기지만, 각 계열사의 사정이나 경영진의 이해관계에 따라 협력이 잘 이뤄지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아직 컴플라이언스(규제준수) 수준이 낮다는 평가도 따른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외국계 IB는 엄격한 글로벌 본사 기준에 따라 규제를 준수하려 하지만 국내 증권사는 정보 유출에 대한 의구심도 있고 사고가 났을 때 책임자가 다 떠나고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증권사가 IB를 넘어서려면 규제준수 등 신뢰도를 먼저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