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리 1년만에 조달카드 다 꺼냈지만…여전히 유동성 목마른 기업들
입력 2023.10.19 07:00
    CJ·롯데·SK부터 LG·한화·삼성까지…자금 마련 '비상'
    한도 차면 은행 대출도 불가…이어지는 자산 매각
    IPO·투자유치도 안 되면 EB…SK그룹 이어 LG까지
    최악 불황 삼성전자도 계열 차입…시차 문제일뿐
    무리수 '증자'도 속출…장기화시 "내년엔 버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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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기준금리 급등 1년 만에 기업이 꺼내들 수 있는 조달 카드 대부분은 시장에 등장했다. 우려를 한몸에 받은 CJ·롯데·SK그룹은 물론 LG나 한화, 삼성그룹까지 자금 마련을 위해 이례적 행보를 보인다. 눈총을 사더라도 주주 돈으로 빚을 갚고 투자를 늘린다며 증자를 밀어붙이는 사례도 이어진다. 고금리 장기화로 체력따라 시차를 둘 뿐 그룹사 전반이 대출, 자산 매각은 물론 메자닌·영구채 발행, 사모대출까지 두루 손을 벌리고 있다. 

      1년 전 레고랜드 사태로 채권시장이 경색되자 당시 은행권에선 조달 시장에서 '갑을(甲乙)'이 바뀌고 있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주식·채권 발행 등 직접금융 시장이 쪼그라들며 모처럼 대기업이 은행 대출 창구를 기웃거린 덕이다. 그러나 계열 여신 한도를 소진했거나 뇌관 격인 부동산 프로젝트금융(PF) 노출도가 높은 기업은 일찌감치 자산 매각에 나서거나 수개월 만에 사모대출 시장으로 방향을 돌려야 했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스프레드(가산금리)가 또 튀면서 기관에서도 발행 시장에 돈 넣을 생각이 없으니, 은행 대출로 가야 하지만 1·2금융권 여신 한도 모두 소진한 기업들은 달리 방도가 없다"라고 설명했다. 

      신용평가사들이 콕 집어 우려를 표한 CJ와 롯데, SK그룹은 꾸준히 자산을 매각하고 있다. 무리한 인수합병(M&A), 사업 확장 및 재무적투자자(FI) 회수 보장, PF 부실 등 각기 사정은 달라도 이들 기업은 시장에서 공공연히 '유동성을 채워야 하는' 그룹사로 분류된다. 

      CJ제일제당은 지난 10일 브라질 자회사인 CJ셀렉타 지분 66% 전량을 4805억원에 매각한다고 공시했다. 7월 중국 자회사 지샹쥐(吉香居) 지분 60%를 3000억원에 매각하기로 결정한 지 3개월여 만이다. 올 들어 계열 유상증자나 투자 유치 등도 진행했지만 여전히 자금 마련을 위해 메자닌 발행이나 알짜 자산 매각 등을 검토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사모펀드(PEF) 운용사나 금융사들은 CJ그룹에서 고수익 거래 기회를 노리고 있다.

      출자시장 한 관계자는 "PE들이 펀딩 과정에서 공공연히 CJ그룹과의 거래 기회를 거론할 정도로 CJ그룹 조달에 주목도가 높다"라며 "은행 등 금융사도 기업 대출에선 여신 한도가 있으니 인수금융이나 출자자(LP)로 나서는 방안이 나쁘지 않아 지켜보는 편"이라고 전했다. 

      롯데그룹도 팍팍하긴 매한가지다. 롯데케미칼은 금리 인상 초입 일진머티리얼즈를 인수한 뒤 지난 1월 파키스탄 자회사를 매각했다. 그러나 PF에서 불거진 유동성 문제로 같은 시기 메리츠금융과 1조5000억원 규모 투자 협약을 맺었다. 시장에선 사실상 롯데가 메리츠금융에서 9000억원을 고금리로 빌린 거래로 통한다. 알려진 금리는 12%지만 수수료를 포함하면 법정금리를 넘겼을 거란 시각이 많았다.

      SK그룹은 지난 연말을 전후해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투자 자산을 유동화하는 방안을 고려했지만 이내 투자 유치나 우선주 발행 등 종전 방식으로 회귀했다. SK쉴더스를 좋은 가격에 팔고,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덕에 SK온 투자 유치를 마무리하는 등 급한 불은 껐다. 다만 계열 전반이 여전히 가장 많은 조달 카드를 상시 검토 중이다. 

      교환사채(EB) 발행은 대기업들의 새로운 선택지로 부상했다. 매각할 자산이 마땅찮고 증자나 IPO도 어려울 경우 보유 주식을 담보로 저리 조달에 나서는 식이다. SK하이닉스는 최악의 업황 속에서 EB를 발행해 숨통을 텄고, SK에코플랜트가 합병 자회사 지분을 담보로 EB를 발행하며 바통을 이었다. 

      지난해 자회사 LG에너지솔루션을 상장시키며 사상 최대 공모자금을 확보한 LG화학도 EB 발행에 동참했다. 당초 NCC 매각이나 LG에너지솔루션 지분 매각 등을 검토하다가 EB 발행으로 선회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도 CJ그룹 등 상승 여력이 갖춘 지분 자산을 보유한 다수 기업들이 EB 발행을 검토 중인데, 투자은행(IB)이나 자문시장에선 새 먹거리로 자리 잡고 있다. 

      시장에선 저금리·고유동성에 올라타 무리하게 확장 전략을 펼친 기업이 아니더라도 고금리 장기화 부담에 조달 다변화에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 LG화학의 경우 모·자회사 모두 가시성이 뚜렷한 2차전지 사업에 발을 담고 있지만 수년 동안 매해 조 단위 투자비를 투입해야 한다. 채권 발행이나 은행 대출 모두 5% 안팎 이자비용을 물어야 하니 한 자릿수 마진율로 버티기 버거울 거란 시각이 많다. 

      삼성전자가 지난 2월 자회사 삼성디스플레이에서 20조원을 빌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삼성전자는 국내는 물론 글로벌 반도체사 중에서도 현금성 자산이 가장 풍부한 기업이다. 그러나 주력인 반도체 부문에서 올해 연간 적자가 불가피한 터라 자회사에서 운영자금을 확보했다. 2분기 중엔 투자비를 마련하려 ASML 보유 지분 일부를 유동화하기도 했다. 투자 업계는 삼성전자가 2012년 이후 11년 만에 외화채 발행에 나설 가능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투자업계 한 관게자는 "고유가·인플레·전쟁 덕을 보는 에너지 섹터를 제외하면 올해 국내 기업 전반 실적 전망은 연초 이후 지속 하락세"라며 "반도체는 적자 구간이고 2차전지도 아직은 버는 돈보다 나갈 돈이 더 많기 때문에 LG나 삼성그룹도 여러 조달 카드를 꺼내드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계열 간 자금이동도 눈에 띄게 늘었다. 한화그룹에선 방산 부문이 호기를 맞아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실적이 두드러지게 늘고 있는데, 벌어들인 돈이 계열 곳곳으로 흘러가고 있다. 올해 들어 태양광 부문 미국 합작법인 계열사는 물론 한화오션 인수까지 방산 부문이 그룹 살림을 도맡는 모양새가 됐다. 

      마땅한 방법이 없는 경우 시장 눈총을 감내하고 유상증자를 강행하기도 한다. 한화그룹은 유상증자 방식으로 한화오션을 인수했는데, 수개월 만에 재차 2조원 규모 유상증자에 나섰다. 주주 돈으로 기업을 인수한 뒤, 재차 투자비까지 걷어가겠다는 모습으로 비친 만큼 잡음이 적지 않았다. 

      CJ CGV이나 SK이노베이션 역시 비슷한 사례로 꼽힌다. CJ CGV는 지난 6월 1조원 규모 유상증자를 추진했는데, 확보 자금으로 채무를 상환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됐다. 이 과정에서 모회사 CJ㈜는 지배력을 유지하려 위해 현금 대신 비상장 주식을 현물출자했는데, 법원에서 가로막혔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 연말 자회사 SK온의 프리 IPO가 지지부진하자 급하게 수혈한 자금을 주주에게 후불 정산했다는 지적까지 나왔다. 

      IB업계 관계자는 "주가를 올리기 위한 복안이 불투명하거나 대주주가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결국 주주 돈으로 빛도 갚고 투자하겠다는 모습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라며 "그만큼 자금 사정이 급하기 때문이긴 하지만 시장 내에서도 비난 여론이 좀 더 우세한 편"이라고 말했다. 

      올 연말께 금리 인하를 점치던 목소리는 종적을 감추고 현 수준의 고금리가 수년 지속될 수 있다는 전망에 다시 힘이 실린다. 라이선스로 장벽을 두른 은행이나 통신업을 제하면 내년 중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기업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업황을 회복 중인 반도체도 아직은 종전 수익성을 회복하기까지 1년 가까이 시간이 필요하고 2차전지는 고금리에 전방 침체 불안까지 겹치고 있다. 핵심 산업 전반이 유동성 부담에서 자유롭지 않단 얘기다. 주요 그룹사 중에선 현대자동차그룹 정도가 유일하게 현금을 넉넉히 쌓아둔 편으로 꼽힌다.

      올 들어 글로벌 시장 자금 상당수는 사모대출펀드(PDF)를 향했는데, 국내 시장에서 기회를 노리는 시각도 적지 않다. 대체투자 수익률 고민이 큰 국내 기관 역시 자금을 묶어두고 시장 상황을 살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