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부 "정비사업 신탁사 책임 강화"…신탁사도 '빈익빈 부익부' 우려 증폭
입력 2023.12.07 07:00
    정비사업서 신탁사 역할 및 책임 확대 방침
    공정 계약·주민 권익보호 등 취지
    일부 규정은 오히려 정비사업에 부담
    중소형 신탁사, 사업비 조달 어려워져…"사실상 포기 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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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국토부가 신탁사의 정비사업 참여를 허용한 지 7년 만에 표준 신탁 계약서와 시행규정을 확정했다. 신탁방식 정비사업에서 주민보호를 목적으로, 신탁사의 책임을 강화하는게 핵심인데 중소형 신탁사들의 긴장도가 상당히 높아졌다. 

      이번 시행규정의 핵심은 ▲사업비 직접 조달 ▲주민이 신탁한 부동산 대상 담보대출 금지 등이다. 이는 신탁사의 정비사업을 지속할 수 있을지 여부를 판가름 할 내용으로, 자본력이 부족한 신탁사일수록 정비사업을 지속하기 어려운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신탁방식 정비사업은 '사업대행자 방식'으로 재개발·재건축 조합을 대신해 도시정비사업을 이끌어가는 방법이다. 당시 지지부진한 정비사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2016년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을 개정해 도입됐다.

      이번 시행규정 확정으로 사업시행자로서 사업관리에 역할을 다하도록 건설사업관리(PM·CM)는 신탁사가 직접 수행해야 한다. 정비사업에 참여하는 신탁사의 책임·참여 인력을 주민에게 제시해야 한다. 토지주 전체회의(총회)와 관리처분계획의 공고 기간 등 주민 의견수렴이 중요한 기간에는 사업 현장에 신탁사 인력을 전담 배치토록 했다.

      초기사업비·공사비 등 사업에 필요한 자금은 앞으로 신탁사가 직접 조달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시공사가 시공사 선정 시 납입하는 입찰보증금을 대여금으로 전환해 초기사업비로 사용하는 현장이 많았으나, 앞으로 사업비 전환은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주민이 신탁한 부동산을 담보로 사업비를 조달하는 것도 금지된다. 

      단순 요율로 적용되던 신탁보수 산정방법도 다양해진다. 상한액을 적용하거나 정액으로 확정하는 등 여러 방식을 표준안에 포함해 주민들이 사업별 특성에 적합한 방식으로 신탁보수를 책정하도록 유도할 예정이다. 산정 방법이 단순 요율방식인 경우 추정 금액을 예시로 제시해야 한다.

      최근 신탁방식 재건축 사업장에서 시공자 해지·사업 중단 등 문제가 이어지자 정부가 제도 개선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서울 노원구 상계주공5단지는 지난달 말 소유주 전체회의를 열고 시공사 GS건설 선정을 취소했다. 원자재 가격 상승 등에 공사비가 늘어나며 소유주가 부담해야 할 분담금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전용면적에 따라 3~5억원 이상의 분담금을 납부할 것으로 보인다. 이 사업장은 2018년 한국자산신탁을 시행사로 선정해 신탁방식을 결정한 후 지난 1월 GS건설을 시공사로 선정했다.

      '여의도 1호 재건축' 사업장인 한양아파트도 신탁방식 재건축을 추진했으나 지난달 시공사 선정 절차를 중단했다. 사업 시행자인 KB부동산신탁이 정비계획안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공자를 선정하는 것은 위법이라는 서울시의 시정 권고가 나왔기 때문이다.

    • 신탁사의 역할과 책임이 확대한 이후 신탁사의 의견은 분분하다. 

      큰 틀에서 보면 취지에 공감한다는 게 다수 업계의 설명이다. 시행규정이 확정되며 일련의 정비사업 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립할 수 있다는 이유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볼 경우 일부 시행규정은 오히려 사업속도나 효율성 측면에서 부담스럽다는 입장도 있다.

      신탁계약 후 2년 내 시행자를 지정하지 않거나 주민의 75%이상 찬성할 경우 신탁계약을 해지할 수 있게 된다. 신탁 계약 해지가 자유로워져 신탁방식 정비사업을 진행하다가 조합 방식으로 갈아타는 사업장도 발생할 수 있다. 물론 신탁사는 계약 해지할 경우 손해배상의 조건을 달 수는 있지만 사업 불안정성이 커지게 된다. 

      사업관리가 힘들어졌다는 평가도 있다. 전담 인력을 현장에 배치하게 되면 업무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정비사업 담당 인력은 한정적인데, 사업장에 파견 나갈 경우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설명이다. 

      사업비 직접 조달, 주민이 신탁한 부동산 대상 담보대출 금지 조치로 인해 자본력이 상대적으로 열위한 중소형·신생 신탁사는 사실상 신탁방식 정비사업에서 손을 떼야 할 가능성도 있다. 이들은 정비사업에 투입할 수 있는 신탁계정도 크지 않다.

      결국 대형 신탁사가 대다수 정비사업을 위탁 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신탁사의 정비사업 '빈익빈 부익부'가 시작된 셈이다.

      대형 신탁사 관계자는 "신탁사가 정비사업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건 신탁사는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등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기 때문에 주택조합보다 조달 여력에 강점이 있기 때문이다"며 "시공사의 입찰 보증금을 빌린다는 건 신탁사의 자본력이 떨어진다는 의미이며, 향후 문제가 발생할 경우 시공사·시행사에 협상력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중소형 신탁사 관계자는 "자금 조달 방안이 줄어들수록 신탁방식 정비사업을 이끌어갈 수 없다"며 "담보 대출은 정비사업이 아닌 일반 사업장에서도 사용하는 방식인데, 완전 금지하는 건 사업 안정성을 방해해 주민을 보호하는 조치라 보기 어렵다"고 전했다.

      신탁업계에 따르면 다음 달 금융투자협회가 신탁사의 의견을 모아 추가로 제도 개선에 나설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