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화석'이 산 '그린(Green)'으로 둔갑…ESG 죽지 않았다?
입력 2023.12.22 07:00
    취재노트
    • 'ESG'라는 단어가 이제는 식상해졌지만 여전히 한국 기업이나 금융기관에는 겉도는 느낌이다. 글로벌 ESG 시장에선 철저한 '을(乙)'이다 보니 시장을 주도하는 서구권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다. 특히나 환경 부문이 그러한데 유럽과 미국이 서로 다른 입장을 내놓으면서 양쪽을 모두 바라봐야 하는 국내 기업들은 방향성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속도를 붙이고 있다. 탄소배출이나 화학물질과 관련된 환경 규제를 더 강화하는 추세다. 이에 우리 정부도 기업들을 상대로 EU의 규제 현황과 추후 전망을 설명하는 자리를 갖기도 했다. 금융기관이나 컨설팅업계는 기업 수요에 맞춰 환경 규제를 중심으로 ESG 리스크와 컨설팅을 전담하는 조직을 새로 만들고 있다.

      미국은 정반대다. 안티 ESG 기조가 강해지고 있다. 그린워싱 논란, 저조한 투자 수익률 등 ESG 회의론이 커지고 있다. 대선 이슈까지 더해지면서 화석연료 의존도가 높은 지역이 텃밭인 미국 공화당이 힘을 싣고 있다. 여기에 고금리, 고물가의 장기화로 경제가 팍팍해지면서 명분보다는 실리를 강조하는 기조가 전반적으로 깔리고 있다.

      블룸버그도 안티 ESG 기조를 조명했다. 모닝스타가 제공한 데이터에 따르면 ESG 지표에 투자하는 펀드는 올해 3분기말까지 보유 자산의 약 2.3%를 화석 연료 자산에 투자했다. 이는 유럽이 ESG 투자 프레임워크를 도입한 직후인 2021년초 1.4%에서 증가한 수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촉발된 유가 급등, 재생에너지의 '끔찍한 한 해'에 따른 자산 가치 변화 등이 반영됐다는 평가다. 글로벌 금융계의 거물급 인사들은 화석 연료를 ESG 투자룸에 가져와야 한다는 요구를 지속적으로 해오기도 했다.

      미국에선 앞으로 '그린워싱'이 그냥 '그린'으로 둔갑할 가능성이 더 커졌다. 재생에너지와 화석연료에너지의 공존을 인정한 셈이다.

      국내 기업의 ESG 경영은 어디로 향해야 할까. 전반적인 방향성이 ESG로 가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이전보다 세밀함과 확장성을 가져가야 실리를 챙길 수 있다. 자칫 유럽의 강력한 기준에만 맞추다보면 미국의 실리적인 기준에 따라가긴 더 어려워진다. 기업 입장에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이다.

      ESG 광풍이 한창 불었을 땐 국내 기업들도 조금은 억지스럽게 여기저기 'ESG'를 갖다 붙였다. 그리곤 그린워싱 논란이 불거졌다. 미국을 중심으로 ESG의 범위가 확장된다면 국내 기업들도 지속성을 위해서라도 속도 조절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들이 ESG 관계자들 사이에서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ESG는 단순히 '숫자'로만 나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를테면 '화석연료로 만든 전기나 원전은 친환경적인가'라는 질문처럼 기업 또는 국가의 '철학'과 '가치관'이 내포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