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해운 파산 시키던 산은은 어디에?…재계 40위 '태영'에도 쩔쩔
입력 2024.01.24 07:00
    취재노트
    한진·금호·두산 등 그룹사 수술 집도한 산은
    실무진 한마디마저 무게감 있던 시절
    워크아웃 이끌 조직도 인력도 이젠 미미
    대우건설 등 주도적 M&A 거래는 감사중
    운신의 폭 줄어든 산은, 가뿐히 패싱한 태영그룹
    • (그래픽=윤수민 기자) 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따지고 보니 태영그룹의 워크아웃 사태에 국가 주요 기관이 총동원돼야하는 상황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대통령실이 나섰고 금융감독원이 전권을 쥐고 일련의 상황들을 진두지휘했다. 대통령의 복심이 앞장서 칼을 휘두르는 동안, 이제껏 대한민국 산업의 구조조정을 주도해 온 산업은행의 존재감이 사라졌다.

      구조조정의 역사에서 산업은행을 빼고 이야기하긴 어렵다. 2010년 전후 국내 건설사가 무더기 워크아웃-법정관리행을 택했을 당시부터 금호·한진·두산그룹이 관리체제에 돌입할 때까지 재무적 어려움을 겪던 기업들은 산업은행을 거치지 않고선 회생의 기회조차 잡기 어려웠다.

      당시만해도 산업은행이 그룹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탓에 일련의 구조조정 성과가 나타났다. 대우조선해양을 한화그룹에, 두산인프라코어를 HD현대그룹에, 아시아나항공을 한진그룹에 자의반타의반(?)으로 매각한 작업은 모두 산업은행의 주도하에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물론 사후 평가는 엇갈린다. 빌려준 돈을 돌려받겠단 채권자 '제1의 원칙'에 충실했다는 평가와 함께 이동걸 전 회장의 치적을 위한 무리한 거래란 지적도 받았다. 다소 과격한 구조조정 과정 속에서 산업은행을 마치 '총독부'에 비유하는 이들도 있었다.

      당시 산업은행 관리를 받았던 기업 임직원들의 말을 종합하면 기업의 오너들은 철저한 을(乙)의 위치에서 욕심을 낼 수도, 내서도 안되는 분위기가 당연시됐다. 이마저도 산은 회장, 부행장이 아니라 부장급 실무진의 위세에 눌린 탓이다.

      산은의 관리를 받아본 한 대기업 출신 임원은 "회의때마다 재떨이가 날아다니는 수준의 분위기 속에서 채무 기업이 협상을 요구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었다"며 "사실상 산은이 모든 권한을 쥐고 구조조정을 진행하는데 따르는게 당연한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

      전례를 비쳐보니 태영그룹을 대하는 산업은행의 자세는 과거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채무자와 협상(?)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타당한지 의문이지만, 워크아웃 협상 과정의 열쇠는 사실상 태영그룹의 오너인 윤세영 회장이 쥐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해보인다. 사실상 "태영만 죽지 않는다"는 겁박과 일련의 고자세를 비쳐보면 누가 돈을 빌린 입장인지 모호해진다.

      산업은행은 최후통첩이라며 태영그룹을 압박하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태영그룹으로부터 얻어낸 것은 없다. 애초 태영건설에 지원이 됐어야 할 태영인더스트리 매각 대금을 뒤늦게 지원된 것 성과로 꼽는다는건 무리가 있다. 심지어 SBS 활용방안은 '조건부 담보제공'이었다. 즉 기존에 자구안을 모두 이행해 본 후, 그래도 유동성이 부족하면 그 때 티와이홀딩스 지분과 SBS 지분을 담보로 제공할 것을 검토하겠단 것이다.

      이런 자구안을 두고 산업은행은 "채권단은 태영그룹이 발표한 추가 자구계획과 계열주의 책임이행 의지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했다.

      벼랑끝에 선 그룹이 돈을 못 갚겠다며 채권자들에게 도와달라며 마지막에 내놓는 '자구안'은 차고 넘쳐도 모자라다. 이제껏 유동성 위기를 겪었던 기업들이 모두 그랬다. 

      금호는 아시아나항공을 내놨고, 두산은 인프라코어와 솔루스 등 거의 모든 핵심자산을 팔았다. 그것도 모자라 두산은 오너들이 모두 주식을 담보로 제공하겠단 확약서까지 '미리'써냈다. 사실상 금호그룹은 해체수순, 두산은 재계 순위밖으로 밀렸지만 그 덕분에 명맥은 유지할 수 있었다.

      산업은행의 상황을 보면 워크아웃-구조조정을 진행할 여력이 있는지도 미지수다. 

      지난 5년이 넘는 기간동안 태영그룹 정도의 워크아웃 사례는 전무했다. 산은 내부적으론 신기촉법에 근거한 워크아웃의 경험이 없고, 실상은 이런 사례를 전담할 인력도 부족하다. 최근엔 대우건설 매각을 두고 감사원이 KDB인베스트먼트에 대한 감찰에 돌입했다. 이를 시작으로 산업은행 주도로 진행됐던 다수의 거래들이 수사 선상에 오를 가능성도 있다. 확장한다면 산은이 투자에 나선 크고작은 거래들이 모두 검토 대상에 들 수 있단 얘기다.

      이렇게 운신의 폭이 줄어든 산업은행이 태영건설의 맹탕 자구안에 사실상 '청신호' 사인을 내자 산은의 눈치만 보던 거의 모든 금융기관은 워크아웃 동의서를 제출했다. 워크아웃 동의율을 96%를 넘겼다.

      총선을 불과 석달여 앞둔 상황, 현 정부에 화살이 돌아갈 지도 모를 이벤트를 최소화해야하는 정부, 이 모든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태영그룹의 오너는 주채권자은행인 산업은행을 사실상 패싱하는게 가능했다. 

      강석훈 회장이 태영그룹을 향해 "자구계획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주채권 은행으로서 대단히 유감스러운 상황(1월3일)"이라는 메시지를 내자마자, 윤 회장은 이복현 금감원장을 직접 만났다(15일). 이 원장은 윤 회장과 허심탄회한 논의를 나눴다는 말을 남기자 태영의 워크아웃은 급물살을 타게 됐다.

      자구계획을 이행하지도 않는 채무자, 내실 없이 윽박만 지른 주채권은행, 전권을 쥐고 전면에 나선 대통령의 복심 등이 펼친 상황들은 기존의 사례와는 너무도 달랐다.

      아직 4.10 총선이란 변수가 남아있다. 언제든 법원행을 택할 수 있고, 산은과 정부에서 절절매야하는 상황에 태영그룹은 지금 고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구조조정의 역사에서 돈을 빌린 기업이 끝까지 주도권을 쥘 수 있었던 사례는 없었는데, 총선이란 변수가 이해관계자들의 지형도를 어떻게 바꿀지 지켜봐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