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주단의 PF 만기연장, 시공사엔 'YES맨' 신탁사에만 'NO'
입력 2024.02.16 07:00
    대주단, 시공사와 달리 신탁사에 연장 안 해
    중소형 시공사 압박해야 득 없다는 판단
    책준형 기한 못 맞춘 사업장 증가 추세
    책준형 비중 높은 신탁사, 위기감 고조
    발표 미뤄지는 금융위의 책준 가이드라인
    • (그래픽=윤수민 기자) 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주단과 신탁사의 갈등이 커지고 있다. 같은 사업장에서 대주단이 시공사의 책임준공기한은 연장하면서, 신탁사의 책임준공형 관리형 개발신탁(책준형) 기한은 연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탁사의 책준형 기한이 시공사의 책임준공 기한보다 먼저 도래하는 '기이한' 구조가 늘어나고 있다.

      최근 국내 한 위기 사업장에서 PF대주단은 A시공사의 책임준공 기한을 7개월 연장했다. 분양은 성공적으로 이뤄졌으나, 금리·공사비 인상 등에 사업 진행이 계획보다 늦어진 영향이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A시공사의 책임준공 기한과 달리 B신탁사의 책준형 기한은 연장되지 않았다. 그 결과 신탁사의 책준형 기한이 시공사의 책임준공 기한보다 앞서게 됐다. 

      일반적으로 신탁사가 책임준공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시기는 시공사의 준공 예정일로부터 6개월을 더한 기간까지다. 시공사가 책임준공 의무를 지키지 못하면 신탁사는 6개월 동안 시공사 교체 등 노력하고, 이후에도 공사기한을 못 맞추면 PF대주단은 공사 지연에 대한 손실을 신탁사에 청구한다.

      이처럼 부동산 신탁 시장에서 유례없이 '기이한' 구조가 늘어나는 추세다. 대주단이 최적의 자금 회수 방안을 고민한 결과로 보인다.

      신탁사가 책임준공을 약속한 시공사 대부분 '위험한' 중소형 건설사다. 통상 도급 순위가 낮은 중견·중소 건설사가 부동산 PF 대출을 받을 경우 대주단은 신탁사의 책임준공확약을 요구한다. 한국기업평가에 따르면 2022년 3월 말 기준 책준형 사업에 참여한 시공사 중 도급순위 100위권 밖인 사업장 비중은 83.5%에 달했다.

      이에 대주단이 위기 사업장에서 시공사의 책임준공 기한을 연장하지 않을 경우, 시공사는 당장 추가적인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다. 시공사 규모가 크지 않아, 한 개의 사업장에서 문제가 생겨도 회사 평판에 타격이 가기 때문이다.

      대주단 입장에서 중소형 시공사를 압박해 봐야 득이 될 게 없다는 판단이다. 새로운 시공사로 교체하더라도 시간과 비용 측면에서 더 손해라는 평가다.

      상대적으로 자금 여력이 있는 신탁사는 상황이 다르다. 대주단은 대출원리금·연체이자 등 책준형 기한을 맞추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손해를 신탁사에 청구할 수 있다. 신탁사에는 '호의'를 베풀 요인이 없다는 분석이다.

      대주단과 신탁사의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특히, 책준형 사업 비중이 큰 신탁사의 불만이 커지는 상황이다. 신탁사의 책준형 기한도 시공사의 책임준공 기한과 함께 연장된 줄 알았다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경우도 있다. 최근 코람코자산신탁의 '부산 신항만 오피스텔 개발사업' 소송 사례처럼 시공사가 제때 완공하지 못한 사업장에 신탁사가 추가로 조달한 사업비의 회수 순위를 두고 대주단과 소송도 늘어날 전망이다.

      업계 관계자는 "대주단은 신탁사 때문에 구조조정이 지연되고 있다고 하고, 신탁사는 대주단 때문에 만기 연장이 안 된다고 하면서 서로 불만을 표출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 대주단의 PF 만기연장, 시공사엔 'YES맨' 신탁사에만 'NO' 이미지 크게보기

      금융당국을 중심으로 책준형 사업의 위험 관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관련 논의는 지지부진하다. 신탁사가 소송 중인 건은 금융감독원에 보고가 이뤄지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작년 하반기 '책임준공확약 관리형 토지신탁 업무처리 모범규준'을 발표하려 했지만, 올해 하반기로 그 시기가 미뤄졌다. 하반기에 금융사 PF 관련 순자본비율(NCR) 위험값 산정 체계를 개편하며 일괄 발표할 계획이다.

      부동산신탁 14개사가 책준형 상품의 위험 통제방안 마련을 위해 논의를 이어왔으나 명쾌한 해결책을 내기는 어렵다는 평가다. 모범규준이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점도 한계로 꼽힌다.

      금감원 관계자는 "PF 관련 NCR 위험값 산정 체계를 개편하면 신탁사의 건전성이 갑자기 안 좋아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2023년 결산이 끝나면 업계의 의견을 들으며 시행세칙을 마련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다만, 신탁 계약은 일대일 계약이라 모범규준은 방향성을 제시할 뿐 구속력이 없다(는 점이 한계)"라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지금 신탁사의 위기는 금융당국의 규제 완화가 만들어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2016년 6월 금융감독원에 책준형은 불법이라는 민원이 올라왔지만 그해 11월 금감원은 유권해석을 통해 책준형은 신탁사의 고유 업무라는 의견을 냈다. 이후 책준형이 본격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당국은 건설사의 연쇄 부도보다 일부 신탁사의 어려움이 덜 부담스러울 거란 시각이다. 제2의 태영건설 워크아웃 사태가 발생하면 부동산 경기가 더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다. 일부 기조가 바뀌긴 했지만 그동안 당국의 '부동산 살리기' 정책에 사실상 신탁사는 빠져있었다. 

      업계 관계자는 "건설사 부도는 파급력이 크지만 신탁사는 무너져도 상대적으로 시장에 미칠 여파가 적다"며 "책준형 상품 비중이 큰 신탁사, 지원을 받기 어려운 비(非)금융지주 계열 신탁사 등은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