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日·대만은 민관이 반도체 밑그림 새로 그리는데…역할론 못찾는 韓 정부
입력 2024.02.27 15:36
    中 대신 美 택한 반도체 투자 600건 돌파…다면적 의미
    日 제1공장 문 연 대만 TSMC…사실상 3국 공조로 해석
    밑그림 구체화하며 3국 반도체 기업 실익도 뚜렷해져
    반도체 경쟁에 정무감각 필수화…韓 정부 역할론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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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미국이 새로 그리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밑그림이 일본·대만 민관 협조로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중국은 빼고 간다는 미국의 기조 아래 3국 이해관계가 맞물려가는 모양새다. 한국 역시 중요한 이해당사국이나 민관 차원 통일된 목소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미·중 택일 기로에서 한국 정부의 역할론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6일(현지시각)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장관은 반도체법에 따라 현지 투자 보조금을 신청한 기업들의 투자의향서가 600건을 넘겼다고 발표했다. 미국 반도체법은 자국 내 반도체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현지에 공장을 짓는 기업에 ▲생산 보조금 390억달러(원화 약 52조원) ▲연구개발(R&D) 지원금 132억달러(약 18조원) 등 ▲5년간 총 527억달러(약 70조원)을 지원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600건 이상 쌓인 보조금 신청 서류가 국내 반도체 산업에 시사하는 바는 다면적이란 평이 많다. 

      외견상 미국이 혜택을 내걸고 투자를 요청하는 모습이나 주도권은 미국이 쥐고 있다. 작년 8월 접수된 서류가 460건이었다. 원가 부담에도 불구하고 미국 땅에 공장을 짓겠다는 반도체 기업이 빠르게 늘고 있다는 얘기다. 예산이 한정된 만큼 보조금 수혜까지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대세를 따라 미국 요구를 적극 수용하기엔 보조금 신청 조건이 발목을 잡을 수밖에 없다. 미 반도체법은 보조금을 받아간 기업이 향후 10년간 중국에 투자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위반시 반납해야 한다. 여기에 사전 제출한 서류에 담긴 재무계획 이상으로 이익을 남기면 보조금의 최대 75%를 반납해야 한다는 조건도 달려 있다. 중국을 버리고 미국을 택하되 너무 많이 벌지도 말라는 메시지로 풀이된다. 

      결국 중국을 버리고 미국 주도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올라탄 기업을 선별해 한정된 혜택을 주겠다는 얘기로 요약된다. 반도체업계에선 현재 일본·대만의 민관 합동 반도체 협력도 미국의 이 같은 청사진 안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미국은 첨단제조 설비가 없고, 일본은 메이저 반도체 기업이 없고, 대만은 미국의 대중국 억제력에 편승해야 하는 식으로 각기 절박함이 맞물리는 구도"라며 "판은 미국이 깔았지만 일본과 대만 정부·기업도 대가를 부담하며 각기 부족한 고리를 채워가는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밑그림의 일부는 이미 완성되기 시작했다. 

      대만 TSMC는 지난 24일 일본 구마모토현에 투자한 제1공장 문을 열었다. TSMC는 지난 2021년 발표한 차세대 패키징 R&D 센터를 포함해 추가 2공장까지 규슈에서 일본 반도체 기업과 공급망 구축하겠다는 계획이다. 겉으로 보자면 대만과 일본이 맞손을 잡는 형국이나 여기에는 미국 정부의 양해가 깔려 있다는 게 시장의 시각이다. 당초 미국은 반도체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동아시아에 편중된 공급망 자체가 안보 위협이라는 논리를 내세운 바 있다. 

      증권사 반도체 담당 한 연구원은 "일본은 소재·장비를 빼면 메이저 반도체 기업이 없어 외국 기업 유치를 통한 부활이 필요했고 TSMC도 마침 늘어난 대미 투자로 부담이 적지 않던 상황"이라며 "일본이 미국 요청대로 대중국 장비수출 규제에 동참하되 TSMC에 자국 소재·부품사 협력 및 아날로그 반도체 고객사를 제공하는 식으로 3국 사이 맞교환이 일어나는 과정"이라고 분석했다. 

      일본 기업이 얻게 될 실익도 점점 구체화하고 있다. 일본 산업성은 이미 3년 전 자력으로 미국 팹리스나 한국의 메모리, 대만 파운드리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결론내린 바 있다. 대신 첨단 제조에서 독점적 지위를 구축한 TSMC가 있다면 르네사스나 소니 외 이비덴·신에츠화학·키엔스 등 유수의 소재·부품사까지 부활에 일조할 수 있다는 복안이다. 시장에선 올해 중 일본 키옥시아와 미국 웨스턴디지털의 합병 역시 재추진될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반도체 경쟁이 기술·자본력 이상의 정무적 감각을 요구하게 된 상징적 장면들로 받아들여진다. 정부 역할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연일 쏟아지는 미국·일본·대만 행보와 비교하면 한국의 경우 뚜렷한 전략이나 방향성이 부재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정부 역시 위기감이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지난 26일 반도체 기업과 간담회를 열고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주요 기업의 현안 등을 파악하는 자리를 가졌다. 산업부에선 이날 간담회 결과에 따라 반도체 추가 인센티브 확대 방안 등을 포함해 오는 3월 '첨단전략산업특화단지 종합 지원 방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시장에선 기대와 함께 아쉬운 목소리도 전해진다. 정부 차원에서 반도체 기업의 현안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 의지를 적극 드러내는 것은 반가운 일이나, 각국 행보와 비교하면 정부 존재감이 미미한 탓이다. 이날 간담회 역시 새 장관 부임 이후 업계 현안 등을 파악하기 위한 첫 대면 성격이 짙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미국과 일본, 대만의 경우 각국을 대표하는 기업 행보가 사실상 각국 정부 의중을 반영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지 오래"라며 "한국의 경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산업 정책의 일관성도 없고, 삼성전자의 투자를 활용해 정부가 생색을 내는 경우도 많았는데, 정부 차원 뚜렷한 반도체 전략을 세울 필요가 높아지고 있다"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