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주 LG화학의 ‘화학’ 출구전략…발등에 불 떨어진 경쟁사·기관
입력 2024.03.12 07:00
    화학 사업 분할 규모 최대 10조…JV 후 매각 가능성
    동북아 대장주 LG화학의 화학 사업 출구전략에 무게
    소비시장 쥔 中·산유국 중동 수직계열화에 끼인 신세
    자산효율화 나선 롯데·효성 등 경쟁사 행보도 영향 多
    국내 화학사 평가도 변화 전망…지형변화 가팔라질 듯
    • (그래픽=윤수민 기자) 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LG화학의 화학 사업 물적분할 및 소수지분 유동화 작업을 두고 내부 임직원은 물론 경쟁사와 기관투자가도 복잡한 심경을 내비치고 있다. 업계에선 LG화학이 쿠웨이트 국영석유공사(KPC)와의 합작법인(JV) 설립을 발판 삼아 출구전략을 펼치는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동북아 대장주인 LG화학이 화학 사업을 벗어나는 상황에서 시장·산업지형의 구조적 변화가 가팔라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8일 투자 업계에 따르면 LG화학은 이르면 이달 중 석유화학 사업 전반에 대한 물적분할 계획을 발표할 전망이다. 여수 지역 납사분해시설(NCC) 두 곳을 포함해 범용 기초소재 사업까지 분할 규모는 최대 10조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신성장 동력으로 내세운 전지·첨단소재와 연계 가능한 고부가가치 스페셜티·솔루션 사업을 제외한 나머지를 떼어내는 과정으로 풀이된다.

      LG화학이 화학 사업을 분할해 쿠웨이트 KPC와 JV를 설립할 경우 3조원 이상 재원을 확보할 수 있다. 당장 시장에선 지난해부터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이 예고했던 자산효율화 작업의 일환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관련 업계에선 JV 이후 중장기적으로 완전한 매각에 나설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인수합병(M&A) 업계 한 관계자는 "그간 LG화학이 2차전지 등 신사업에서 증설비 부담을 낮추기 위해 고객사와 JV 파트너십을 맺은 것과는 달리 사실상 소수지분 투자 유치"라며 "이번 JV는 우선 투자자를 유치한 뒤 단계적으로 매각에 나설 수 있는 방식에 가깝다"라고 설명했다. 

      한국은 에틸렌 생산능력 기준 석유화학 시장 4위국이다. 중국을 제외하면 국내 1위인 LG화학이 사실상 동북아 대장주로 꼽힌다. 그런 LG화학이 화학 산업에서 출구전략을 펼치고 있다는 얘기다. 

      이미 화학 업계에선 지난 수년 중국의 후방(다운스트림) 확장이 국내 화학 산업에 미칠 영향을 예의주시해 왔다. 중국은 수십년 동안 최대 손님이었으나 자급률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원유-정유-석유화학-수요산업까지 단계적으로 수직계열화를 달성하고 있다. 화학 산업의 출발점(업스트림)에 속하는 NCC 업체로선 손님이 직접 요리하고 식당까지 차리겠다는 상황이다 보니 생존 문제로 대두됐다. 실제로 중국은 수년 내 업스트림 전 부문에서 순수출국으로 전환할 전망이다. 

      LG화학이 쿠웨이트 KPC와 맞손을 잡는 건 중동 오일머니를 통해 중국 시장 위협에서 벗어나는 전략으로 분석된다. 쿠웨이트는 물론 사우디 아람코 등 중동 원유 생산국 역시 정제(정유)부터 분해설비까지 아우르는 COTC 형태 수직계열화에 한창이다. 중장기 석유 수요 성장이 한계를 앞두고 있는 만큼 원유 이상의 부가가치를 마련하기 위해 다운스트림으로 영토를 확장해야 하는 탓이다. 

      대장주인 LG화학이 가장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만큼 롯데케미칼을 필두로 경쟁 대기업의 셈법도 복잡해질 것으로 보인다. 

      LG화학 외 경쟁사 역시 NCC 단독 설비 기반 규모의 경제만으로는 장기 생존이 불투명하다 판단하고 지역 다각화 및 고부가 중심 믹스 개선, 2차전지 소재 진출 등 방식으로 대응해 왔다. 이 과정에서 늘어난 재무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해외 법인을 매각하는 등 자산효율화에 나선 것이지만 앞으로는 화학 사업 지속 여부에 대한 물음에 답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증권사 화학 담당 한 연구원은 "대장주가 전통 석화 사업에서 발을 빼는 장면 자체가 생경한데, 경쟁사들의 행보에 대해서도 시장의 반문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라며 "석유화학 산업의 글로벌 지형 자체가 중국과 중동으로 재편되는 과정이니 진행 중인 증설 프로젝트나 매각·유동화 등 자산 재배치 작업도 새로 따져봐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롯데케미칼이나 효성화학 등은 현재 해외 법인이나 특수가스 등 스페셜티 사업의 매각·유동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모두 화학 사업을 지속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LG화학 사례는 원유 생산국인 중동과 막대한 소비시장을 갖춘 중국이 한꺼번에 수직계열화에 나선 만큼 화학사 단독으로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판단을 시사하고 있다. 

      기관투자자 역시 대응을 위한 고민이 커질 것이란 반응이 나온다. LG화학을 시작으로 지형 변화가 가팔라지면서 국내 화학사에 대한 평가 자체가 바뀔 수 있는 탓이다.  

      LG화학은 이번 분할·유동화 작업 이후 2차전지 소재와 같은 신성장 사업에 집중할 계획인 것으로 파악된다. LG화학은 화학 사업 외에도 첨단소재와 바이오까지 기존 주력 사업을 대체할 기반을 두루 갖춘 편에 속한다. 배터리 셀 자회사 LG에너지솔루션을 통해 캡티브(계열 내부시장) 풀 역시 가장 탄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경쟁사 역시 2차전지 소재 시장으로 저변을 넓혀 왔으나, LG화학 수준 기반을 갖춘 곳은 드문 편이다. LG화학이 가장 먼저 움직인 만큼 경쟁사 행보도 분주해지겠지만, 신사업 성과나 주력 사업을 대체하는 속도에선 차이가 날 가능성이 높다. 

      증권사 한 관계자는 "2차전지 소재 역시 넓게는 화학 사업의 일종이지만 그간 기관 자금은 둘을 서로 다른 영역으로 구분해 운용돼 왔다"라며 "LG화학의 출구전략이 구체화할수록 산업 지형은 물론 시장 자금흐름 역시 크게 바뀌게 될 전망"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