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자본시장 침체 길어지자…국내 자문사와 경쟁에도 벅찬 글로벌IB들
입력 2024.04.04 07:00
    1분기 M&A 사실상 전멸, IPO도 아직 잠잠
    대형 거래 줄면서 글로벌 IB 활약상도 주춤
    눈높이 낮춰 국내 증권사·회계법인과 경쟁도
    하반기 이후 실적 부진 만회 여부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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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글로벌 투자은행(IB)의 한국 내 존재감이 줄어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 지는 오래다. 하지만 자본시장의 침체가 길어지면서 그 우려의 시각은 점점 늘어가고 있다. 오랜 기간 쌓은 기업 네트워크와 업무 수행 실적을 활용해 버티고는 있으나 국내 증권사와 회계법인에도 우위를 점하기 쉽지 않은 모습이다. 글로벌IB들이 1분기 극심한 부진 속에 하반기엔 이를 얼마나 만회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올해 1분기 M&A 자문 시장은 순위를 가리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잠잠했다. 조 단위 거래가 실종됐고, IB의 활약상도 없다시피 했다. 주식자본시장(ECM)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부 공모주 투자 열기가 있었지만 시장 분위기를 반전시킬 대형 거래들의 성공 가능성은 불투명하다. 최대어 중 하나로 꼽힌 CJ올리브영 상장(IPO)은 사실상 백지화됐다.

      2분기 이후 반전을 기대하지만 낙관하기 어렵단 시선도 적지 않다. 상당수 고객이 보수적인 시각을 갖고 움츠린 터라 거래를 수면 위로 끌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2022년부터 일감 기근에 시달린 IB들은 가시방석이다. 이름값에 기대어 긴 호흡을 갖고 하는 사업이라지만 3년째 이어진 부진에는 낯이 상할 수밖에 없다. 핵심 인력 이탈로 일할 사람이 없다는 곳도 적지 않다.

      지난달 골드만삭스에선 정형진 전 한국 대표가 물러났다. 지배구조 개편 작업, 보스톤다이내믹스 인수 등으로 연을 맺은 현대차그룹으로 적을 옮겼다. 한국 IB업계 터줏대감이었지만 지난 수년간 자본시장에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못한 영향이란 평가가 나온다. 이석용 전무, 윤윤구 부문장 등 매니징디렉터(MD)를 잇따라 배출했지만 최근 활약상은 드물었다. 지난 수년간 주축 인력들의 이탈도 이어졌다.

      JP모건은 올해 조솔로 수석본부장이 투자금융부 총괄로 승진했고, 하진수 ECM 총괄은 서울지점장으로 취임하며 주목받았다. JP모건은 물밑의 파이프라인을 여럿 갖고 있지만 손에 잡히는 성과가 많지는 않았다. 승진 인사를 잇따라 낼 상황으로 보기 애매한 탓인지 일각에선 본사 차원에서 한국 시장에 대한 ‘배려’를 한 것 아니냐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작년 크레디트스위스(CS)와 통합한 UBS가 그나마 활발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과거 이천기 부회장-이경인 대표 체제가 이경인 부회장-심종민 전무 체제로 바뀐 양상이다. 상대적으로 낮은 자문료를 지급하고 양질의 IB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꼽힌다.

      다만 통합 과정에서 상무급 주축 인원 상당수가 기업과 경쟁사로 이적하며 전력이 많이 약해졌다. 일단 염가로 일을 시작하고 차차 수임을 확대해가는 옛 CS의 전략이 UBS의 정책과는 상충된다는 지적도 있다. 국적 항공기 통합, 아시아나항공 화물 사업 매각 등에서 제대로 된 보수를 챙길 수 있을지 미지수다.

      글로벌 자본시장은 점차 온기를 되찾고 있다.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JP모건 등 빅 3는 물론 에버코어 등 M&A 자문사도 시장 활황 덕을 보는 분위기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 차가운 공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작년 공매도 금지에, IB의 불법 공매도 혐의 등 규제 환경도 척박하다. 애초에 한국 시장에서 큰 돈을 버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라지만 부진이 수년째 이어지니 본사의 시선이 곱긴 어렵다.

      한 IB에선 비용 절감을 주문하는 사내 메일이 계속 뿌려지고 있다. 택시 대신 대중교통 이용, 종이컵 사용 금지, 해외 출장시 경유 항공기 탑승 등이다. 또 다른 IB는 반드시 필요한 자리가 아니면 출장을 가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IB의 비용 감축령에 한국의 클라이언트가 초청 형태로 비용을 대는 사례도 등장했다는 후문이다.

      올해 최대 계약 거래가 될 뻔했던 HMM 매각은 한 때 시장을 주도했던 글로벌 IB들의 한국 내 입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들은 작년 초 주관사 선정에서 고배를 마셨고, 이후 인수 자문 성과도 없었다. 이 외에 대형 거래가 드물어지니 중소형 거래까지 눈을 낮추고, 수임료 고집을 살짝 내려놓는 모습도 보인다. 당장 돈이 되지 않아도 기업과 사모펀드(PEF) 등의 고민을 나누며 수임 기회를 찾기도 한다. 최근엔 노무라, 다이와 등 상대적으로 몸값이 싼 외국계 IB의 움직임이 부쩍 잦아졌다.

      한 IB 업계 관계자는 “자본시장에서 쟁쟁한 IB 하우스들의 존재감이 사라진 상황”이라며 “IB들이 눈높이를 낮춰 국내 증권사와 회계법인이 관장하던 소형 거래의 영역까지 뛰어들면서 수임 경쟁이 더 격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나마 쟁여 둔 거래들이 많다는 점은 다행이다. 지오영(모건스탠리), 프리드라이프(BofA), 롯데손해보험(JP모건), 에코비트(UBS·씨티), 제뉴원사이언스(씨티) 등 M&A와 HD현대마린솔루션(UBS·JP모건), 케이뱅크(BofA) 등 IPO가 올해 결실을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