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과 손 잡으면서 견제까지 해야 하는 삼성전자
입력 2024.05.03 07:00
    6월 삼성전자는 美에서, 인텔은 韓에서 AI 행사 개최
    AI 시대 들어 복잡해진 역학구도 상징하는 행보 평
    인텔이건 네이버건 사업부마다 고객사이자 경쟁사
    양면전쟁에서 다면전쟁으로…변수는 기하급수적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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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삼성전자가 놓인 경쟁 환경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인공지능(AI) 시장이 개화하며 영역을 불문하고 고객과 경쟁사 간 경계가 흐려지는 탓이다. 회사를 둘로 쪼개기 시작한 인텔과의 최근 관계가 대표적이다. 반도체 업계에서도 향후 양사 이해관계가 어떻게 굴러갈지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AI 시장이 커질수록 유사한 사례는 늘어날 전망이다. 삼성전자가 대응해야 하는 역학관계 변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다. 

      30일 삼성전자는 1분기 실적 발표회(IR)를 통해 오는 6월 미국에서 파운드리 행사를 열고 AI 플랫폼 비전을 공유하겠다고 밝혔다. 최근 삼성전자가 현지 투자를 위해 미국 정부와 예비 협약을 체결한 데 따른 행보로 풀이된다. 삼성전자는 미국 정부로부터 9조원 수준의 보조금을 약속받고 60조원 이상 투자에 나설 예정이다. 

      삼성전자의 미국 투자 성패는 고객사 확보에 달려 있다. 미국에서 개최할 파운드리 행사 역시 잠재 고객사를 겨냥한 것으로 분석된다. 엔비디아는 물론 칩 독립을 꾀하는 팹리스들이 전부 미국에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이번 투자를 통해 북미 현지에서 고대역폭메모리(HBM)부터 선단공정 파운드리, 첨단 패키징까지 일괄 공급 가능한 유일한 회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같은 시기, 삼성전자의 북미 시장 최대 경쟁사인 인텔은 한국을 찾는다. 6월 중 서울에서 AI 행사를 열 예정인데,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물론 네이버와 삼성전자도 주요 연사로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국내엔 네이버를 제외하면 적기 AI 인프라 투자에 나선 기업이 없다시피 하다. 인텔 입장에선 잠재 고객사도 마땅치 않은 불모지에 수장이 행차하는 격이라 이례적이란 평이 나온다.  

      여러 해석이 오가지만 시장에선 반도체 시장 역학관계가 얼마나 복잡해지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으로 꼽힌다. 

      인텔은 최근 자사 AI 반도체 '가우디'를 기반으로 네이버와 중장기 파트너십 구축을 공식화했다. HBM 기반인 가우디의 경쟁작은 AI 서버 시장을 독점한 엔비디아의 H100과 같은 칩이다. 인텔로선 네이버가 가뭄에 단비 같은 고객사이자, 자체 SW 생태계 구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파트너인 셈이다. 삼성전자 입장에서 보면 이 둘의 시너지는 메모리 사업부의 HBM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잠재 고객이 된다. 

      반면 네이버는 삼성전자와도 자체 AI 반도체인 '마하-1' 출시를 준비하며 맞손을 잡고 있다. 인텔 가우디와는 달리 LPDDR 기반 추론용 반도체로 알려졌다. 여기서 삼성전자에 네이버는 파운드리 사업부의 미래 고객이 되고 인텔은 경쟁사가 된다. 현재 인텔은 2030년까지 파운드리에서 삼성전자를 추월하겠다는 목표를 내걸고 있다. 올 들어 삼성전자 출신 영업 인력을 채용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네이버가 삼성전자의 고객사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삼성전자 역시 시스템LSI에서 자체 AI 반도체를 설계하고 있다. 올해부터 갤럭시 S24를 필두로 온디바이스 AI 생태계 마련에 사활을 걸고 있다. 내용에 따라 네이버와 인텔은 삼성전자의 경쟁자일 수도 있고 고객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이 모든 이해관계가 개별 사업부 형태로 삼성전자 한 몸에 들어 있다는 점이다.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인텔이 네이버를 대하는 방식을 두고 영업전략에 엄청난 공을 들이고 있다는 평가가 많은 상황"이라며 "현재 인텔은 제조와 설계를 분리하고 회계처리부터 팹이나 공급망관리(SCM) 같은 인프라까지 분리를 예고하고 있다. 향후 영업전에 대비하기 위한 체질 개선이란 평이 지배적"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로선 파운드리 사업에 국한되던 고객과 경쟁하는 모순이 전 사업부로 확산하는 모양새다. 고려해야 할 경우의 수가 부지기수로 늘어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찍이 반도체 업계에선 HBM과 같은 주문형 메모리 반도체가 부상하기 이전부터도 삼성전자의 양면전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늘어나고 있었다. 지난 3년 메모리와 비메모리 양대 전선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한 해 투자비는 50조원까지 불어났기 때문이다. 지난해 반도체 업황이 이례적 침체를 거치자 쌓이기만 하던 현금은 1년 만에 수십조원 이상 줄어들었다. 

      현재는 메모리도 비메모리도 주문형 반도체가 대세로 자리 잡으며 양면전쟁이 다면전쟁으로 확산하는 형국이다. AI 반도체 수요가 늘어나며 인텔이 파운드리 영업을 강화할수록 삼성전자의 대응에 대한 시장 관심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증권사 반도체 담당 한 연구원은 "HBM부터 로직 반도체 설계, 제조는 물론 아날로그까지 다 갖춘 유일한 종합반도체(IDM)이라는 포지션이 아직까진 양날의 검으로 통한다"라며 "현재 AI 시장 지형이 매 분기 뒤바뀌고 있어서 고객사-공급사 간 역학구도도 계속 뒤집히고 있는데, 삼성전자 앞에 놓인 경우의 수가 너무 많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