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 양극화 심화…PF 부실·브로커리지 경쟁서 밀려
정책 혜택도 대형사 중심…중소형사 입지 좁아져
M&A·사업 재편 불가피…새 성장동력 모색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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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증권업계를 중심으로 중소형 증권사 위기론이 재차 확산하고 있다. 국내 증시 활황에 힘입어 업황 자체는 호조지만, 대형사와 중소형사 간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일부 하우스는 인력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업계 안팎에서는 "호황의 그늘에서 중소형사의 생존게임이 본격화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16일 증권업계에 따르면 유진투자증권은 최근 권고사직을 통한 인력 감축 작업에 착수했다. 지점 차원에서 일부 인력이 조정 대상에 올랐으며, 본사 차원에서도 인력 효율화 가능성이 점쳐진다. 회사는 조직 정예화를 위한 선택이라는 입장이지만, 시장에선 "유진이 신호탄이 돼 중소형 증권사 인력 감축이 본격화할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진행중인 권고사직과 관련해 유진투자증권측은 "현재 일부 직원들을 대상으로 권고사직을 진행하고 있고, 이는 회사의 중장기 사업 전략과 조직의 사업 성과, 조직 진단 결과에 따른 인력 정예화 차원"이라며 "직원의 의사가 최우선순위이며, 사직을 수용할 경우 적절한 보상 등을 제공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증권업계 주니어 인력들 사이에선 벌써부터 이직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고용 불안 심리가 커지면서 다른 증권사, 나 자산운용사, 핀테크 기업 등으로의 이직을 고민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한 중소형 증권사 주니어급 실무진은 "최근 중소형사를 위주로 구조조정 이야기가 자주 나와 걱정이 크다"라며 "선제적으로 탈출구를 찾는 경향이 뚜렷해진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흐름에는 업계 전반의 뚜렷한 '양극화'가 있다. 자기자본 3조원 이상 종합금융투자사업자(종투사) 가운데 발행어음 인가 보유사 등은 다변화된 수익원을 확보하며 안정적인 실적을 기록하고 있다. 주식 시장 활황으로 브로커리지 수익도 개선됐지만, 전체 위탁매매 시장 점유율에서 중소형사들의 존재감은 제한적이다.
자본력이 부족한 중소형사들은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여파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일부 사업장에서 정상화 조짐이 나타나고는 있으나, 중·후순위 비중이 높은 중소형사의 경우 여전히 익스포저(노출액)가 상당하다는 평가다. 호황기 고수익·고위험 비중을 늘렸던 곳일수록 대손비용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실제로 국내 신용평가사 분석에 따르면 대형사 대비 중소형사의 PF 익스포저는 중·후순위 비중이 두 배 안팎으로 높아 손실 민감도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브릿지론·본PF 모두에서 중소형사의 후순위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지적이다.
IB 부문에서도 양극화는 두드러진다. 초대형 IB들이 대규모 IPO, 해외 투자, M&A 자문을 주도하는 반면, 중소형사들은 소규모 딜조차 확보하기 쉽지 않다. 전통 IB 재건 움직임으로 경쟁이 격화한 데다, 수수료 경쟁력 확보가 어려워졌고 계열사를 통한 '캡티브' 영업에 대한 당국의 감독도 강화되는 추세다.
금융당국의 정책 방향 역시 대형사 중심으로 흐르는 양상이다. 발행어음과 IMA(종합투자계좌) 등 신규 제도적 혜택은 사실상 대형사만 소화할 수 있는 구조다. 최근에는 발행어음·IMA 조달·운용에 대한 규율 정비와 모험자본 공급 의무화 논의 등 제도 개편도 이어지고 있어 중소형사에는 추가 부담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적 어려움은 고용뿐 아니라 사업 전략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인력 감축은 비용 절감 차원을 넘어 생존을 위한 몸집 줄이기로 해석된다. 일부 증권사는 현재 영업점 축소, 특정 사업부 재편 등 '선제적 효율화'를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중소형 증권사 위기론'은 그동안 신용평가사를 중심으로 시장에서 꾸준히 제기돼왔다. 변동성이 큰 실적 구조, 제한적인 자본 확충 능력 등으로 언제든 구조조정 가능성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많았다. 최근의 권고사직 사례는 이러한 우려가 가시화된 것으로 해석된다.
일각에서는 중소형사들의 선택지가 결국 인수합병(M&A)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위기 상황이 심화할수록 단독 생존보다는 대형 금융그룹 편입이나 중형사 간 합종연횡이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과거 외환위기 이후 중소형 증권사들이 시장에서 재편된 사례가 적지 않았다.
2002년 굿모닝증권이 신한증권과 합병해 굿모닝신한증권을 거쳐 현재의 신한투자증권으로 발전한 것이 대표적이다. 2005년에는 LG투자증권 우리증권을 흡수합병하면서 우리투자증권(현 NH투자증권)이 출범하기도 했다. 2010년대 초반 메리츠종합금융과 메리츠증권이 합병해 자본 확충과 사업 확장으로 종합금융투자사업자로 도약한 사례도 비슷한 맥락이다.
다만 단기적 구조조정만으로는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PF 익스포저 정리와 자본 확충, 수수료 경쟁력 제고와 동시에 WM·자문·디지털 플랫폼 등 비교우위 영역을 선별해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인력 감축은 단기적 대응에 불과하다"라며 "중소형사가 생존하려면 PF 익스포저 축소와 자본 확충은 물론, 특화 사업을 강화해 수익원을 다각화할 필요가 있다. 최근 해외의 강소 증권사 모델을 참고하기 위해 자문사들을 중심으로 관련 사례를 연구하는 움직임이 늘어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