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품 떠나면 가치 치솟는 자산들 시장서 회자
주식 거래하듯 치른 M&A 두고 반성 새어 나와
하이닉스 수익성 극대화하자 美 투자법인 출범
한화그룹 우회지원 의혹과 겹쳐 보인단 우려
ADR 검토 중…AI 허브 전략적 정당성 입증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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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 열풍이 한창이던 수년 전만 해도 투자업계에선 두산그룹이 원전 사업을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걸 의아해 하는 시선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원전을 지어야만 하는 세상으로 회귀했다. 역시 투자은행(IB) 실무자들과 기업인, 사업가들의 시야가 다르구나 하고 새삼 느꼈다"
인수합병(M&A) 시장에서만 십수년 사이클을 겪은 대형 IB 담당임원의 말이다. 두산그룹이 어디까지 내다보고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다. 특정 대기업 안목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사업하는 사람들이 주식 거래하듯 경영 판단을 내려선 곤란하다는 의미로 들렸다.
SK 리밸런싱 3년차…"꼭지에 사서 바닥에 팔았나" 복기
탈원전과 ESG 열풍이 한창일 때 두산에너빌리티 주가는 5000원 안팎까지 떨어졌다가 현재 10만원을 코앞에 두고 있다. 실적과 비교하면 실제 가치보다 부풀려져 있긴 하다. 그러나 미국 원전 건설에 조력할 수 있는 동맹국 진영 내 몇 없는, 국내 유일한 기업이라는 희소성이 몸값을 떠받치고 있다. 주식처럼 접근했다면 애초에 팔았다가 뒤늦게 다시 사느냐를 두고 고민이 깊어졌을 것이다.
리밸런싱 3년차에 접어든 SK그룹 내부에서 이런 고민들이 새어 나온다. 비핵심 자산으로 판단하고 매각한 자산들이 뒤늦게 가치가 치솟는 경우가 반복되면서다.
여기에는 팬데믹 시절 풀린 유동성이나 트렌드 탓에 ▲실제 가치보다 비싸게 사들인 자산부터 ▲이를 위해 일으킨 레버리지 부담을 해소하려 매각한 알짜 캐시카우 ▲차익을 남겼지만 앞으로 사업적 시너지가 무궁무진한 투자지분 등이 포함돼 있다.
흔히들 자본시장 접근성이 높고 활용 노하우가 뛰어난 걸 SK그룹 강점으로 꼽는다. 그러나 사업을 언제든지 사고 팔 수 있는 포트폴리오로만 접근하면서 손실이 누적되고 있다는 지적이 안팎에서 나온다. 산업에 대한 이해 없이 유행을 좇아서 주식을 사고파는 개인투자자들이 주로 이런 식의 수업료를 지불하는 편이다.
다행히 SK하이닉스 덕에 그룹 내 실패들 대부분이 가려지고는 있다. 실제로 SK하이닉스 현금 창출력을 감안하면 그간 계열사들이 사고 파는 과정에서 발생한 손실들이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SK하이닉스 곳간이 그룹 곳간일 수 없고, 계열 경영진들도 함부로 손을 벌리기 어렵다. 상법 개정 이후로 주주 동의를 구하기 어려운 방식의 직접 지원도 어려워졌다. 각 계열사 정체성을 비틀어서라도 SK하이닉스 성장세에 올라타기 위한 조치들이 이어지지만 당장 재무 부담을 해소하기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방식이다. SK하이닉스가 그룹 자랑거리이긴 하지만, 계열사들엔 그림의 떡인 셈이다.
AI투자법인 된 美 솔리다임…한화퓨쳐프루프 기시감
SK하이닉스가 이번에 출범시킨 AI컴퍼니는 이 같은 고민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묘수로 주목받고 있다. 공교롭게도 SK하이닉스의 현금 창출력이 정점에 올라선 시점에 맞춰 미국 현지에 투자법인이 출범했기 때문이다.
해당 법인은 SK하이닉스가 인텔 낸드 사업부를 인수하며 차린 솔리다임 법인을 AI 솔루션 기업으로 전환한 것이다. SK하이닉스가 100억달러(원화 약 14조5000억원)를 출자하고 향후 수년에 걸쳐 투자를 집행하기로 했다. 단순한 메모리 공급사를 넘어 AI 생태계 조성에 직접 참여하는 파트너로 도약하기 위한 결정이라고 한다.
투자업계에선 약정된 100억달러 사용처에 각사에 흩어져 있는 AI·반도체 테마 자산이 포함돼 있을 것으로 내다본다. 자산을 넘기는 쪽은 당장 재무 부담을 덜어내고, SK하이닉스는 관련 자산의 잠재력이 그룹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구조다. 출범 목표를 생태계 조성으로 설정한 만큼 부품, 소재, 에너지 등 밸류체인 전반이 투자 대상에 오를 수 있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작년에 SK에코플랜트가 매각한 블룸에너지 주식 평균단가가 약 25달러인데, 지금 주당 170달러를 넘보고 있다"라며 "그룹 AI DC 디벨로퍼 비전이나 SK하이닉스 록인(Lock-in) 구축에 핵심적인 자산을 헐값에 매각한 셈이다. 이런 아쉬움이 AI컴퍼니 출범 배경 중 하나로 거론된다"라고 설명했다.
AI컴퍼니가 미국 현지 소재 비상장 자회사이다 보니 지난 연말 한화그룹 사례와 겹쳐 보인다는 평가도 나온다. 당시 ▲한화솔루션이 한화퓨쳐프루프 지분 50%를 신설 해외법인에 매각하고 ▲한화오션과 한화시스템은 각각 해외법인을 거쳐 신설회사 증자에 참여하며 ▲한화솔루션이 8500억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화오션·시스템이 한화솔루션 보유 자산을 사들인 구조였지만 계열 우회지원이라 문제 삼기 모호한 측면이 많았다. 실질적으로 투자 결정을 내린 건 미국 현지 신설법인이었기 때문이다. 이사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이 이뤄지기 전이었다면 구태여 이런 복잡한 구조를 짜지 않았을 거란 분석이 뒤따랐다.
대기업 투자실 한 실무자는 "SK하이닉스가 직접 계열사에서 지분을 사들이는 건 지분제한 규제 문제도 있지만 주주 반발이나 배임 시비를 동시에 감수해야 하는 선택"이라며 "지금으로선 한화 사례와 같은 방식일진 알기 어렵다. 그러나 미국 현지 비상장 투자법인을 활용한 간접 투자 구조가 이런 부담을 피할 수 있는 경로이긴 하다"라고 전했다.
계열 우회지원 시비 피하려면 전략적 정당성 보여줘야
이런 시각들이 단순한 기우에 불과할 수도 있다. 전략적으로도 여러 상장사가 AI·반도체 관련 자산을 따로 품고 있기보다는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는 회사를 중심으로 재정렬하는 게 유리하다. 현재로선 시장 내 위상으로 보나, 자본력으로 보나 SK하이닉스보다 허브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는 계열사가 없는 실정이다.
뒤집어 보자면 전략적 정당성을 직접 입증해내야 계열 우회지원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유동성 급한 계열사들이 당장 팔기엔 아쉬운 자산을 돈 많은 계열사에 넘기려는 시도가 아니라 ▲SK하이닉스 성장 궤도에 AI 생태계를 묶어두기 위한 중장기 전략임을 보여줘야 하는 셈이다.
AI컴퍼니가 또 하나의 '그룹 내' 주식 거래로 끝나면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거란 시각도 있다. SK하이닉스는 현재 주주환원책 일환으로 자사주를 미국주식예탁증서(ADR) 발행에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지금보다 해외 투자자풀이 넓어질 경우 SK그룹 특유의 금융기법에 대한 견제·감시 목소리 역시 늘어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