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건설사, '기획 역량' 확보 시급하다
입력 16.04.04 07:00|수정 16.04.04 07:29
비중 줄어가는 단순 도급형 수주 모델…금융조달 '관건'
상사 활용 일본, M&A 활성화 유럽 '벤치 마킹' 의견도
  • 건설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글로벌 건설업체들은 사업을 기획하고 스스로 금융 조달을 해 발주처에 역(逆)으로 대규모 사업을 제안하고 있다. 도급 사업에 치우쳐진 국내 건설사들의 입지는 날로 좁아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건설업체들의 '기획 역량' 확보를 가장 시급한 과제로 꼽는다. 주어진 설계도대로만 짓는 것에서 벗어나 스스로 사업을 기획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종합상사를 통해 해외 사업장에서의 경험을 축적한 일본 모델과 적극적인 인수합병(M&A)으로 역량을 쌓은 유럽 모델 등 글로벌 선두 업체들의 성공사례를 참고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  '기획 능력' 없는 국내 건설업…금융 활용까지는 '첩첩산중'

    해외 건설시장에서 국내 대형 건설사들의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지난해 기준으로 국내 건설사들의 해외사업 중 90% 이상은 여전히 단순 도급형 사업이 차지하고 있다. 최근 저유가로 인한 중동 재정악화·재정이 열악한 신흥국 시장의 특성 등으로 해외 시장에서 도급 사업의 비중은 감소하고 있다. 투자개발형·시공자금융 등 금융을 활용한 사업이 도급 사업의 공백을 대체하고 있지만, 국내 건설사의 진입은 지지부진하다. 지난해 금융을 활용한 건설 사업 수주액도 오히려 전년 대비 절반 가까이 줄었다.

    전문가들은 건설 업체들의 ‘기획’ 능력 부재를 근본 원인으로 지적한다. 도급사업에서도 수익성 판단을 내리지 못해 대규모 손실을 기록해왔던 건설업체들이, 당장 사업을 기획하고 금융을 조달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시각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국내 업체들은 설계·구매·시공(EPC) 중 시공에만 익숙할 뿐 스스로 사업을 기획해 본 경험도 역량도 없다”며 "결국 사업성을 평가할 능력도, 수주한 사업장의 위험을 어떻게 분담할지도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금융 조달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 기획 역량의 중요성은 오랫동안 건설업계의 ‘아킬레스 건’으로 지적됐다. 국내 주택 사업으로도 일정 정도 수익이 유지되고, 해외에서도 저가 수주에 집중해왔던 국내 건설사들이 절실함을 느끼지 못했다는 평가다. 하지만 국내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고, 해외에서 도급형 사업 비중이 줄면서 점차 기획 역량 확보가 중요해졌다.

    ◇ 일본·유럽 각각 상사 활용, M&A로 기획 역량 축적…"벤치 마킹 나서야"

    해외 성공 사례를 참고하자는 목소리가 나오면서 유럽과 일본 업체들의 성장 모델이 주목 받고 있다.

    금융과 건설간 융합을 선도한 국가들은 각국의 산업 특성에 맞춰 기획력을 확보해왔다. 일본은 미쓰이·미쓰비시 등 종합상사의 세계적인 네트워킹을 활용해 진출 국가의 사업성 판단 능력을 확보했다. 상사가 발굴한 사업에 정부도 공적자금을 집중적으로 투입해 국가-기업 간 협력 모델을 구축했다.

    프랑스 방시(Vinci), 스페인 ACS 등 유럽 대표 건설사들은 적극적인 M&A를 통해 부족한 역량을 채웠다. 금융 활용에도 익숙해 운영·관리(O&M) 부문으로 사업구조 변화를 이뤘다.

    정창구 해외건설협회 금융지원처장은 “유럽업체들의 매출 대부분은 시공에서 나오지만, 수익 대부분은 O&M에서 나올 정도로 전통적인 건설사 사업 모델에서 탈피했다”며 “중국과 터키 업체의 가격경쟁력을 이길 수 없는 현실에서 국내 기업들도 공사에선 적정마진을 추구하되 운영 등 다른 부문에서 이익을 얻도록 체질전환에 나서야 한다”라고 말했다.

    국내 건설사들도 상사가 네트워크를 확보한 일부 국가를 중심으로 협력에 나서고 있다. 자금 조달·사업 발굴 등 시공 앞 단계에서 상사를 활용해 ‘트랙 레코드(Track record)’를 쌓고 있다. 대규모 네트워크를 확보한 일본 대형 상사들과 국내 건설사 간 협업도 이뤄지고 있다. 주로 중남미 시장을 중심으로 일본 상사들과 협력이 추진되고 있다.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손을 잡은 LG상사와 현대엔지니어링이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현지에 네트워크를 구축한 LG상사를 활용해 정유 공장·가스 설비 플랜트 등 수주를 넓혀가고 있다. 현대종합상사(러시아 및 독립국가연합), 포스코대우(아프리카), LG상사(중앙아시아) 등 각 상사가 장점을 지닌 지역을 중심으로 협업에 나설 가능성이 전망되고 있다.

  • M&A의 경우 인수후통합(PMI) 등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 2012년 GS건설이 스페인 수처리업체 이니마(현 GS 이니마)를 약 2억3100만유로에 인수했지만 지난해 다시 매물로 내놨다. PMI 실패 사례다. 한 건설사 내부 관계자는 “동양계 기업이 유럽 회사를 인수하면 고급인력들은 퇴사하려는 움직임이 많아 인력이 전부인 건설업에선 헛돈을 쓰는 셈”이라며 “사실 인수보다 인수 후 운영이 쉽지 않은 점이 고민”이라고 말했다.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올 하반기부터 국내 시장 전망이 좋지 않고 해외 사업에선 선별 수주 외 마땅히 새로운 대책을 찾지 못했다"며 "기술력 갖춘 유럽업체가 적정한 가격에 나오면 M&A에 나설 수도 있고, 기존 일본 상사는 물론 중국 업체와도 협력을 추진하는 등 다각도로 방향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