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당착에 빠진 産銀 비금융출자회사 패키지 매각
입력 16.09.09 07:00|수정 16.09.12 09:51
정책자금 마련은 수백억 불과…수천억 물린 한진해운과 대비
정책금융기관 정체성 흔들…매각 어렵자 사실상 NPL식 처분 나서
대우證 패키지 매각 노하우 활용한다지만 처한 상황도 가치도 달라
정부 ‘부실 대기업’ 오명 씻겠다는 명분론에 출자회사 매각 종용
  • 산업은행이 비금융 출자회사를 한 번에 패키지로 묶어 팔기로 했다. 성장 초기 기업에 대한 투자를 사실상 부실채권(NPL) 처리와 같은 방안으로 종결 짓겠다는 것이다.

    ‘부실 대기업’이란 오명을 씻겠다는 명분론에만 빠져 현실과 정체성에 반하는 결정을 내린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산업은행은 개별 회사에 대한 비공개 매각을 거쳐 5월부터는 공개 매각을 이어갔다. 큰 성과가 없자 이사회는 지난달 30일 비금융 출자회사에 대한 패키지 매각안을 의결했다. 매각이 완료됐거나 구조조정 혹은 개별 매각 추진 중인 곳을 뺀 중소·벤처기업 81개사가 매각 대상이다.

    신속한 매각을 위해 장부가 이상 매각 원칙은 포기했다. 고의·중과실이 없고 실사에 따른 시장 가치로 매각한다면 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다. 협상을 통한 계약을 맺기 위해선 40일 이상의 공고를 해야 하지만, 단축공고(10일)만 내고 자문사를 선정하기로 했다. 이달 중순 자문사를 선정하고 다음달 패키지 매각공고를 낼 예정이다. 2018년까지로 잡았던 매각 완료 시기를 앞당겨, 연내 가시적인 성과를 내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산업은행이 신속한 자회사 매각을 위해  여러 노력을 하고 있지만 매각의 당위성이나 실효성이 모호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일단 실효성 차원에서 앞뒤가 맞지 않다.

    정부는 매각 자금을 정책자금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패키지 매각 대상 기업 전체의 장부가를 모두 더해봤자 700억원 수준. 그마저도 받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많다. 정책자금 마련이란 명분은 공감을 얻기 어려운 반면,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담당 부서는 손실처리를 걱정해야 한다. 산업은행은 구조조정 원칙을 지키며 수천억원이 물린 한진해운의 손을 놓았다.

    더 큰 문제는 정책금융기관으로서 산은의 '역할론' 과 원칙을 뒤엎는 작업이란 점이다.

    성장 초기 기업에 대한 정책금융기관의 투자는 성과가 좋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그런 위험 부담을 지면서도 산업 육성을 위해 감내하는 것이 정책금융기관의 역할로 인식됐다.  산업 지원이 아니라 수익성에 무게를 뒀다면 이런 류의 투자 자체를 꺼리는 동시에, 확실한 회수구조를 짰을 것이다.

    결국 산업은행의 이런 형태의 중장기적인 투자는 더 어려워지고, 민간 수준의 깐깐한 안전장치만을 요구하는 방식이 예상된다. '정책금융기관'이 더 이상 아니라고 스스로 선언하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결국 산업은행은 가치가 제각각인 투자회사를 적당한 가격, 그리고 한번에 처리해 줄 수 있는 곳을 찾고 있다. 이러다보니 NPL 관련 업체가 아니면 참여하기 어려울 것이란 평가도 나온다.

    아울러 패키지 매각 방식의 실효성은 의문이다.

    산업은행은 대우증권 패키지 매각을 성사시킨 담당 부서를 확대해 이번 매각을 맡겼다. 1조원 이상의 차익을 거둔 노하우에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나 대우증권은 누가 얼마에 인수할 것이냐의 문제만 있을 뿐 매각 자체를 의심하는 곳은 없었다. 산은자산운용 역시 인기 매물은 아니었으나 개별 가치를 인정받고 팔렸다.

    묶어서 팔면 가치가 없는 주식도 처분할 수 있지만 반대로 제 값을 받을 수 있는 자산의 가치만 희석시킬 가능성이 있다. 유찰된 후 수의계약으로 전환하거나, 다시 개별 매각을 추진하기 위한 명분쌓기 용 시도라는 분석도 나온다.

    제대로 된 가치 평가가 이뤄질지도 의문이다. 회계와 법률자문사 선정에 배정된 예산은 각각 2억원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 법무법인 관계자는 “지금 예산으로는 회사의 정관만 살펴보는 수준도 어렵다”며 “자문실적을 쌓기 위해 손실을 감수할 의사가 있는 곳만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산업은행 내부에서도 패키지 매각의 당위성을 찾기 어렵다며 회의적인 반응이 많다. 대우건설과 대우조선해양 등 관리부실 여파로 산업은행은 '100곳 이상의 자회사를 거느린 부실 대기업'이란 오해를 받게 됐다. 이는 정부의 매각 종용으로 이어졌다.

    산업은행 관계자들은 “정부 역시 매각 대상회사가 경영권과 무관하고 회수 방안이 마땅치 않으며 손실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며 “그럼에도 일단 비는 피하고 보자는 생각으로 출자회사 매각 방침을 고수하는 분위기”라고 입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