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지는 석유화학 '빅딜' 요구…구조조정 대상 기업들, 새정부에 '촉각'
입력 25.06.12 07:01|수정 25.06.12 07:09
적자 지속에 재편 압박 가중된 석화업계
대기업별 상황 엇갈려…정부도 부담 느껴
PRS로 임시방편 택해도 '빅딜' 머지않아
"NCC 구조조정 필수지만 지역정치 얽혀 곤란"
  • 이재명 정부 출범과 함께 국내 석유화학 업계에 구조조정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새정부가 공약으로 내세운 '석유화학 특별법' 제정을 앞두고 나프타분해설비(NCC) 사업에 대한 대대적 재편이 예고되면서, 각 이해 관계자들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실적 부진에 시달리는 기업들은 적자 사업 정리를 통한 구조조정을 모색하는 한편, 투자은행(IB) 업계는 대형 자문 기회를 기대하며 시장 변화를 예의주시하는 분위기다.

    투자업계에 따르면 현재 국내 10개 NCC 설비 중 상당수가 중국발 공급과잉과 원가경쟁력 악화로 심각한 경영난에 직면해 있다. 그중에서도 여수산업단지에 집중된 4개 NCC(LG화학·롯데케미칼·여천NCC·GS칼텍스)는 해외 나프타 의존도가 높아 운임비 부담이 가중되면서 구조조정 압박이 더욱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석유화학 대기업들의 현황은 제각기 다르다. LG화학은 지난해부터 쿠웨이트 석유공사 자회사인 PIC와 여수NCC 2공장 매각을 추진해왔지만, 자산가치 산정을 둘러싼 의견 차이로 협상이 결렬된 상태다. IB업계에 따르면 LG화학은 석유화학 불황 속에서도 설비 가치와 전략적 중요성을 인정받는 선에서 매각을 검토하려 했으나, '헐값 매각' 논란을 우려해 신중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여수와 대산 양 지역에 NCC를 보유한 롯데케미칼은 올해 1분기 석유화학 부문에서 영업적자를 기록하면서 재무 건전성 악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올해 상반기 주가수익스와프(PRS) 방식으로 6500억원을 조달하는 등 임시방편적 유동성 확보에 나서고 있지만, 금융권에 회사채 발행과 유상증자 등을 문의했으나 자문사들이 모두 반대하는 상황으로 알려졌다. 여전히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셈이다.

    여천NCC도 지난해까지 3년 연속 영업손실을 기록하면서 중동 기업과의 매각 협상설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모회사인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 올해 4월 2000억원의 유상증자를 진행하며 숨통을 텄지만, 한화솔루션 본사 상황도 녹록지 않다. 한화솔루션은 지난해 약 3000억원의 적자를 내며 1분기 말 기준으로 부채비율이 200%에 근접한 상태다. 일반적인 회사채 발행이나 은행 대출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현재 증권사들과 5000억원 규모의 PRS 조달을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울산 기반의 SK지오센트릭은 SK에너지로부터 나프타를 전량 공급받는 수직계열화 구조를 갖추고 있어 원가 경쟁력 면에서 여수 지역 기업들보다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2027년 에쓰오일의 샤힌프로젝트 완공을 앞두고 있어 장기적으로는 공급과잉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할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구조조정의 '1차 타깃'으로는 실적이 눈에 띄게 부진한 기업들이 거론된다. 투자업계에서는 LG화학의 여수NCC와 한화솔루션의 여천NCC가 대표적인 정리 대상으로 꼽히고 있다. 두 기업 모두 이미 물밑에서 매각 대상으로 거론된 바 있어 구조조정에 대한 의지를 어느 정도 드러낸 상태다.

    하지만 신정부의 석유화학 사업 재편을 둘러싼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한 정책금융 관계자는 "새 정부에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할 상황"이라면서도 "강제적 구조조정은 시장에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어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가 디테일하게 개입하는 것보다는 업계가 자율적으로 방안을 마련해오면 그에 따른 법과 제도, 금융 지원을 제공하는 방식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의 신중론에는 지역정치적 고려사항도 작용하고 있다. 여수와 울산은 각각 전남과 경남의 핵심 산업기지로, 대규모 고용과 지역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크다. 그중에서도 여수는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 과정에서 석유화학 대전환을 통한 에코산단 조성을 공약으로 내세운 지역이기도 하다. 

    재계 한 관계자는 "정부가 특정 지역의 NCC를 집중적으로 구조조정한다면 지역 정치인들과 갈등이 불가피하다"며 "새 정부 출범 초기부터 이런 분란을 겪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맥락에서 이재명 정부는 당근과 채찍 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보인다. 구조조정에 적극 나서는 기업에는 세제 혜택과 금융 지원을 제공하는 한편, 소극적인 기업에는 각종 규제와 지원 배제를 통해 간접적 압박을 가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정부가 추진 중인 NCC 통합운영 제도도 이런 우려를 반영해 강제적 통폐합보다는 기업 간 자율적 협의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설계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석유화학 업계는 현재 국내 석유화학 생산능력 자체를 대폭 줄여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정부가 주도해 석화 리밸런싱을 해야 하는데 현재는 기업에 온전히 책임을 맡기는 구조"라며 "캐파가 너무 커서 빅딜이 있으려면 확실한 베네핏을 줘야만 한다"고 지적했다.

    구조조정 논의가 본격화하기 전까지 석유화학 기업들은 각종 임시방편으로 유동성 위기를 모면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PRS 방식의 자금 조달이다. 롯데케미칼이 물꼬를 튼 PRS 방식은 회계상 부채로 잡히지 않아 부채비율 관리에 유리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일반 회사채 대비 1~2%포인트 높은 금리를 적용받는 데다 만기 도래 시 재계약을 통해 상환을 연장하는 구조여서 장기적으로는 더 큰 재무 리스크로 돌아올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IB업계 관계자는 "어려워진 화학사들이 재무비율을 맞추기 위해 작년부터 PRS 발행을 시작했다"며 "회사채 재무약정 위반을 피하기 위해서는 부채비율 관리가 필수인데, 시중은행 여신 한도는 이미 가득 찬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IB업계는 대형 구조조정 딜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고 있다. 특히 NCC 업체들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상황에 있는 기업을 중심으로 딜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앞선 IB업계 관계자는 "새 정부에서 NCC 관련 구조조정 딜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대기업들이 십시일반으로 좋은 딜을 내놓아야 하는데 각자 이해관계가 달라 시일이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결국 이재명 정부의 석유화학 정책은 정부 주도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시장 친화적 유도라는 미묘한 균형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구조조정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누군 살리고, 누군 정리한다'는 식의 선별적 지원이 시장 불안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각 기업들의 생존 전략과 지역정치적 고려사항, 그리고 IB업계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국내 석화업계의 미래가 결정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