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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콘텐츠 업계가 투자 유치 절벽에 내몰렸다. 코로나 유동성 호황기 시절 'K-콘텐츠' 열풍에 힘입어 조 단위 투자금이 몰렸던 시장이지만, 이제 국내에선 투자자를 찾기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일부 재무적투자자(FI)들은 드래그얼롱(동반매도요구권) 행사를 검토하며 엑시트 압박을 가하고 있다. 해외 투자자를 물색해봐도 호응은 냉담하다. 넷플릭스 등 글로벌 플랫폼에 주도권을 내준 상황에서 국내 콘텐츠 업계의 미래가 불투명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국내 1위 멀티플렉스 사업자 CJ CGV의 상황이 복잡해지고 있다. 아시아 지역 영화관 관리 지주사인 CGI홀딩스를 둘러싼 미래에셋증권 PE본부와 MBK파트너스의 투자금 회수 시점이 다가오면서다. 이달 19일부터 FI의 드래그얼롱 행사가 가능해지면서, 관련 당사자들 사이의 협상이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투자은행(IB)업계 고위 관계자는 "6월19일 권리행사 가능 기간을 앞두고 FI들이 여러 안을 검토 중인 상황"이라며 "드래그얼롱이 행사되면 CGI홀딩스의 경영권 매각이 현실화하는데, 투자자들이 이런 시나리오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고 있다"고 말했다.
2019년 투자 당시 MBK파트너스는 70%, 미래에셋PE는 30% 비중으로 CGI홀딩스 지분 28.57%를 인수하며 총 3336억원을 투자했다. 이후 CJ측이 일부 지분을 재조정하면서 현재 투자자들의 지분은 17.58%로 줄어든 상태다.
FI들은 CJ그룹의 콜옵션(매수청구권) 행사를 기대하고 있지만,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CJ CGV가 올해 발행한 400억원 규모 신종자본증권이 완전 미매각되는 등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다. 지난해에도 1200억원 규모 신종자본증권 발행에서 240억원밖에 투자자가 나타나지 않아 960억원이 미매각됐다.
연이은 자금조달 흥행 실패는 영화산업에 대한 시장의 냉담한 시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에 시장에선 CJ가 이번에도 일부 지분만 사들이고 투자 기한을 연장하거나, FI가 드래그얼롱을 통해 매각을 추진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매각이 성사되면 대금은 '워터폴 구조'에 따라 FI가 선순위로 회수하게 된다.
CJ그룹 내부에서도 고민이 깊은 것으로 전해진다. CGI홀딩스는 CJ CGV 내에서 매출 비중이 상당한 알짜 자산이지만, CJ 입장에선 미디어 사업 재무구조 개선이 급선무인 상황이다.
앞선 IB업계 관계자는 "CJ의 우선 목표는 재무 개선이기 때문에 현금 창출 능력이 있는 CJ제일제당이나 CJ올리브영과 달리 CJ CGV는 우선순위에 있는 사업은 아니다"라며 "최근 롯데시네마와 메가박스 합병 건도 시장 지형에 변화를 줄 수 있어 어떤 결정의 트리거가 될 것 같다"고 설명했다.
롯데컬처웍스(롯데시네마 운영사)와 메가박스중앙(메가박스)의 합병도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양사는 현재 합병과 함께 주관사를 선정하고 최대 4000억원 규모 투자유치를 추진하고 있지만, 투자업계 반응은 회의적이다. 메가박스의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으로부터 정책금융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한 명분 쌓기 성격이 짙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롯데시네마 역시 과거 매각을 추진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던 전력이 있어 이번 합병이 근본적 해결책이 될지는 의문이다. 산업은행 내부에서도 양사의 합병이 진정성 있는 구조조정인지, 아니면 일시적 위기 모면용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된 것으로 전해진다.
새 정부의 K-콘텐츠 지원 정책에 대한 기대도 제한적이다. 한 정책금융 관계자는 "정부의 콘텐츠 지원 사업은 VC(벤처캐피탈)를 통한 제작 지원 방향 위주"라며 "아직 롯데시네마와 메가박스를 직접적으로 지원하는 안은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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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단위 밸류로 시장의 주목을 받았던 드라마 제작사 SLL중앙의 상황도 녹록지 않다. 2021년 프랙시스캐피탈과 텐센트로부터 4000억원을 유치했지만, 내년 3월 회수 기한을 앞두고 엑시트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 지난해부터 골드만삭스 주관으로 신규 투자자를 유치하고 있지만, 국내 투심이 나빠 해외 투자자 모집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제작비 상승도 콘텐츠 제작사들의 주된 부담 요인이다. 넷플릭스 등 글로벌 플랫폼의 공격적 투자로 제작비가 급등했지만, 국내 제작사들이 이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해외 판권 수익도 모든 작품이 '오징어게임' 같은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수익성 확보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국내 콘텐츠 업계 관계자는 "제작비 상승때문에 매년 수천억원 규모의 운영자금이 필요하다"며 "드라마는 글로벌 인기를 얻고 계속 흥행하고 있지만 제작비를 감당하기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국내 OTT '왓챠'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왓챠는 올해 490억원 규모 전환사채(CB) 상환에 실패하면서 외부감사인으로부터 '감사의견 거절'을 통보받았다. 신한회계법인은 "회사의 계속기업으로서 존속 능력에 유의적 의문을 초래한다"고 밝혔다.
왓챠의 지난해 매출은 338억원으로 전년 대비 22.83% 감소했고, 완전자본잠식 상태에 빠졌다. 2021년 당시 중소기업이 3300억원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았음에도 현재 투자자들과의 CB 연장 협상에 난항을 겪고 있다.
그나마 국내 OTT 업계의 '빅뱅'으로 불리는 티빙-웨이브 합병도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조건부 승인 이후 양사는 업계 첫 공동 요금제를 출시하며 시너지 효과를 노리고 있지만, 넷플릭스라는 압도적 강자 앞에서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넷플릭스는 압도적이고, 디즈니도 최근 자리매김하면서 올라오는 상황이라 티빙과 웨이브는 어떤 형태로든 대비책을 찾으려 하고 있다"며 "방향성 자체는 긍정적이지만 실제로 어떤 성과가 있을지는 따져봐야 한다"고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대선 과정에서 'K-컬쳐 시장 300조원 시대'를 강조했던 이재명 대통령 취임 이후 CJ ENM 주가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일시적 현상이란 지적이 적지 않다. 앞선 애널리스트는 "새 정부의 콘텐츠 정책 활성화 기대와 중국과의 관계 개선 기대, 티빙 합병 승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주가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장기적인 효과를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평가했다.
투자업계에서는 국내 콘텐츠·미디어 회사들에 대한 회의론이 확산되고 있다. 2021년 콘텐츠 투자 호황기와 달리 현재는 금리 상승과 유동성 축소로 투자 환경이 악화됐다. 특히 중국 리스크와 글로벌 OTT 성장 둔화까지 겹치면서 콘텐츠 업계 전반의 밸류가 하락하고 있다.
한 사모펀드(PEF)업계 관계자는 "국내 콘텐츠 산업의 구조적 문제가 명확하기 때문에 기존 투자자들 사이에서도 빠른 철수 분위기가 감지된다"며 "넷플릭스만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채 자금 조달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근본적인 사업 모델 재검토가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CGI홀딩스, FI 드래그얼롱 행사 가능성 현실화
SLL중앙, 해외 신규 투자자 유치도 난항 지속
토종 OTT 왓챠는 CB 상환 실패로 존폐 위기 직면
티빙-웨이브 합병도 "넷플릭스 앞 역부족" 지적
롯데시네마-메가박스 JV, 금융지원 이끌어낼까
SLL중앙, 해외 신규 투자자 유치도 난항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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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5년 06월 18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