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나는 '꼼수' 신종자본증권 발행 시도에 신평사들 골머리
입력 25.08.05 07:00
발행사의 영구채 자체에 모회사 보증 씌워
상환 의무 없는 영구채 특성상 보증은 허울뿐
어려운 기업들 발행 두드리지만 신평사는 난색
  • 이자를 못 내거나 만기에 상환하지 못해도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신종자본증권(영구채) 발행 시도가 늘고 있다. 신용평가사들은 자본시장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해 '무책임' 구조의 영구채 발행 시도를 저지하고 있다. 기업 신용도를 평가하면서도 기업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신용평가사가 언제까지 '꼼수'를 막을 수 있을지는 변수다.

    작년부터 국내 비금융기업들은 재무 여력이 떨어지자 영구채 발행 규모를 늘리고 있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작년 국내 비금융기업이 발행한 만기 30년 이상 영구채 규모는 5조원을 넘어섰다. 기업의 영구채 발행이 최대치를 기록한 2019년을 넘어선 것은 물론 재작년 물량의 세 배에 달할 정도로 증가 추세가 가파르다. 올해도 이러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채택국제회계기준(K-IFRS)에 따르면 영구채는 발행자가 원금이나 이자에 대해 현금 등 금융자산으로 상환할 계약상 의무를 부담하지 않는다. 계열사가 모회사의 신용등급을 활용해 낮은 이자로 영구채를 발행할 경우 모회사는 만기 상환, 이자 납입 등 별도로 만든 의무에 보증을 씌웠다. 계열사가 상환과 이자 납입을 못하면 모회사가 대신 해준다는 것이다. 작년 11월 이마트24가 이마트의 원리금 지급 보증을 바탕으로 발행한 1000억원 규모의 영구채가 대표적 사례다.

  • 그런데 최근 모회사가 계열사의 영구채 자체에 보증을 씌워 발행을 시도하는 '꼼수' 사례가 늘고 있다. 원금 상환과 이자 납부 의무가 없는 영구채에 보증한다는 것은 결국 모회사가 어떠한 보증 채무도 지지 않겠다는 의미다. 비금융기업뿐 아니라 보험사 등 금융사에서도 같은 구조로 발행을 시도하고 있다.

    '책임 없는 구조'의 영구채 발행 시도가 늘어나는 이유는 간단하다. 세 주체(발행사, 모회사, 주관사)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발행사는 모회사의 높은 신용등급을 활용해 저렴한 금리로 회계상 자본을 확충할 수 있다. 발행사의 모회사는 이행할 채무가 없어 부담 없이 계열사를 지원할 수 있다. 발행을 주관하는 금융기관은 영구채가 발행될 때마다 수수료 장사를 할 수 있다.

    신용평가사들은 이러한 방식의 영구채 발행 시도가 늘어나자 골머리를 앓는 것으로 전해진다. 영구채는 어려운 기업에 있어 사실상 마지막 조달 수단인데 '꼼수' 시도가 허용되면 자본시장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혹여나 상환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투자자의 손실은 물론 지난 2022년 '흥국생명 영구채 조기상환(콜옵션) 거부 사태'처럼 경제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영구채를 발행하는 기업들은 재무구조가 좋지 않다. 미상환 우려가 커지는 이유다. 한국기업평가에 따르면 2021년 이후 신용등급 A급 기업의 발행 비중이 늘고 있으며, 이들의 평균 부채비율은 592.6%다. 영구채를 발행하지 않은 A급 기업의 평균 부채비율 120.1%와 비교하면 약 5배 차이난다.

    한국기업평가는 "영구채 발행 기업들의 평균적인 재무구조는 (…) (동일한 신용등급을 보유한 영구채 미발행 기업) 대비 열위한 수준이다"며 "영구채 발행은 자본비용 절감, 절세 효과 등 다양한 경제적 유인이 있을 수 있으나 자본 확충을 통한 재무 레버리지 개선이 가장 결정적인 발행 유인이다. 높은 금리 부담에도 불구하고 재무구조 보완 필요성이 큰 기업들이 지분 희석이 없는 자본 확충 수단으로 영구채를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분석했다.

    금융사들도 신종자본증권을 자본비율을 높이기 위해 적극 활용하고 있다. 작년에도 한 금융그룹 계열 보험사는 모회사(신용등급 AAA급)의 신용도에 기대 똑같은 수준의 금리 조건을 요구하기도 했다.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하려면 두 곳 이상의 평가를 받아야했지만 이를 충족하지 못해 없던 일이 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신용평가사 관계자는 "한 번 열어주면 금융지주 산하의 모든 보험사들이 AAA 등급을 달라고 할텐데, 이 경우 이상한 등급의 신종자본증권이 시장에 양산될 수 있다"며 "자본 인정을 받으면서, 금리도 낮게 받겠다는 것인데 이런 사례가 많아지면 자본시장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신용평가사 관계자는 "아직은 신용평가사가 꼼수 영구채 발행 시도를 막고 있지만 최근 모회사가 '실제 보증 채무가 존재하지 않는 보증'에 참여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어 언제까지고 막을 수 있을까 우려된다"며 "선례가 생기면 이후에는 우후죽순 영구채 발행이 이뤄질 것"이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