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동원해 기업 압박하는 당국, 다시 부각되는 'ESG'
입력 25.08.11 07:00
대통령 '중대재해' 질타에 금융위 응답
은행 여신 평가에 중대재해 반영 검토
업계 '실효성' 의문…'관치금융' 우려도
한동안 식었던 ESG 열기, 다시 불붙나
  • 정부가 중대재해가 반복되는 기업에 대해 은행 대출을 제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평가에 안전 리스크를 반영해 실질적 제재를 가하겠다는 의도로, 당국 차원의 제도화 논의가 시작된 것이다. 은행권에선 ESG 요소를 정량화해 대출 심사에 반영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반응과 함께, 과도한 정책 개입에 따른 관치금융 논란도 우려하고 있다.

    3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중대재해 발생 기업에 금융 불이익을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지난 7월 29일 국무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사망 사고가 반독되는 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며 포스코이앤씨를 공개적으로 질타한 후, 금융위가 바통을 이어받아 해결방안과 관련한 실무 검토에 착수한 것이다.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국무회의에서 "산재 사망 사고가 반복되는 기업에 대해 금융기관이 대출 시 불이익을 주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보고했고, 이 대통령 역시 "아주 재미있다"라며 긍정적으로 반응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은행들은 기업 여신 심사 시 ESG 요소를 일부 반영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영향력은 미미하다는 평가다. ESG는 보통 체크리스트 수준으로 운용돼왔고, 그중 'S(Social)' 항목에서 기업의 사회적 평판이나 윤리경영 등을 포괄적으로 점검할 뿐, 산재 사고 여부를 별도 항목으로 평가하지는 않는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ESG는 실질적 평가보다는 형식적 절차에 가까웠다"며 "중대재해처럼 구체적인 사고를 여신 평가에 반영하려면, 은행 간 기준을 어떻게 정립하느냐가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금융당국은 이와 별개로, 산재 발생이 잦은 대형 건설사·조선사 등을 대상으로 중대재해 이력과 대응 조치 등을 신용평가에 반영하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경우 기존의 정량 중심 평가체계에 대한 전면 수정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정부의 이 같은 움직임을 두고 금융권 일각에선 당국을 동원한 기업 압박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특히 중대재해가 주로 발생하는 건설업과 조선업 등 특정 업종에 대출 규제가 집중될 경우, 기업의 자금 조달 불균형이 초래될 수 있다는 우려다.

    실제로 지난해 발생한 전체 중대재해 사고의 절반 가까이가 건설업에서 나왔다. 업계 특성상 유동성 확보가 필수적인데, 사고가 발생할 경우 대출이 막혀버리면 협력사까지 연쇄적인 유동성 위기에 내몰릴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산재가 원청의 책임인지, 하청의 책임인지 판단이 불명확한 경우도 많다"며 "사실상 실적과 무관한 사안으로 대출을 제한하면 기업 경영에 대한 과도한 개입으로 비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책 추진의 배경에 금융위 내부의 '정치적 동기'가 깔려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국정기획위원회가 금융위의 정책 기능을 기획재정부로 이관하는 방안을 대통령실에 보고하면서, 금융위 해체 가능성이 현실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한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은행의 대출 기준에까지 정부가 개입하는 건 과거 관치금융의 전철을 밟는 일"이라며 "금융위도 이를 알면서도 대통령의 발언에 맞춰 무리하게 호응한 측면이 있다"라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아직 논의 초기 단계라 거론되는 대출 제한 규제가 현실화할 지 여부는 예단하기 이르지만, 당분간 ESG 기조가 강화될 것이라는 데는 공감대를 형성한 분위기다. 한때 '열풍'으로까지 불렸던 ESG가 최근 1~2년간 상대적으로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새 정부 들어 다시금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지금 당장 제재성 규제가 도입되기는 쉽지 않겠지만, 당국이 ESG를 다시 꺼낸 것 자체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며 "앞으로 은행들이 ESG 평가 항목을 형식적으로 넘기기 어려운 분위기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금융위는 1일 금감원과 은행연합회, 시중은행 여신 담당자 등과 중대재해 기업 관리 방안을 논의했다. 이번 회의에서는 은행권의 기업 여신 평가 내규와 운영 현황 등 개괄적인 상황만 공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당국은 추후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보다 구체적인 관리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