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 RA '들어오지도, 남지도 않는다'...망가지는 리서치 생태계
입력 25.08.11 07:00
고강도·저보상 속 승격 기회 희박…운용사·VC로 이직 행렬
AI 대체와 채용 축소 맞물려 남은 인력 노동강도 심화 지속
"RA는 결국 리서치센터의 핵심…리서치 역량까지 위협" 우려
  • 증권사 리서치 어시스턴트(RA) 직군의 이탈이 가속화하고 있다. 단순한 퇴사를 넘어 자산운용사·벤처캐피탈·일반기업 등으로의 전직이 본격화되면서, RA 인력 수급 불균형 문제가 시장에서 부각되고 있다는 평가다.

    RA는 산업별 전문성을 축적하는 리서치 조직의 '뿌리'이자, 애널리스트로 성장하기 위한 필수 경로로 기능해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RA 채용 TO 자체가 줄고 있고, 애널리스트로의 승격도 보장되지 않으면서 진입 자체를 꺼리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3일 증권가에 따르면 올해 주요 증권사 리서치센터에서 최소 10명 이상의 RA가 타 업권으로 이직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이 이직한 업권은 독립 리서치기관, 컨설팅사, 사기업 IR팀, 자산운용사, 벤처캐피탈(VC) 다양하다. 한 중견 증권사 리서치센터의 RA는 정규 애널리스트 제안까지 받았음에도, 승격 이후에도 나아질 게 없다는 판단에 자산운용사로 이직한 것으로 전해졌다.

    리서치센터 인재들이 리서치 생태계를 이탈하는 현상이 반복되면서, 기존 RA의 공백은 물론 신규 진입조차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들어오지도 않고, 남지도 않는' 인력 구조가 고착화되는 양상이다.

    이탈 요인 중 가장 빈번히 언급되는 건 '워라밸'이다. RA의 하루는 통상 오전 6시에 시작된다. 글로벌 시황과 섹터별 뉴스를 정리하고, 장중 종목 이슈·공시·거래 흐름을 실시간으로 점검한다. 오후에는 기업 탐방, 세미나 자료 정리, 보고서 지원 작업 등이 이어지고, 야간에는 리포트 인쇄와 회의자료 제작까지 마무리해야 한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RA 시절엔 새벽 1시쯤 퇴근하는 게 일상이었다"며 "전철을 타고 귀가한 기억이 거의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이어 "주말에도 애널리스트 요청이 있으면 즉시 대응해야 해, 동료들끼리 '주말 대기조'라고 부를 정도였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이러한 고강도 업무에도 불구하고, 보상 체계는 수년째 제자리라는 점이다. 중소형 증권사의 RA 초봉은 4000만원대, 대형 증권사도 5000만원대 수준으로 알려졌다. 이는 10년 전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다. 실적에 비례한 성과급이 가능한 IB 등 프론트 직무와 달리, RA는 인센티브도 제한적이다.

    기존 보상 체계의 정체와 함께, AI 도입도 RA 수급에 제약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생성형 AI가 실적 요약, 뉴스 클리핑, 리포트 초안 작성 등 리서치센터의 핵심 업무 일부를 대체하면서, 증권사들이 RA 채용을 더욱 보수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한 증권사 고위 관계자는 "요즘은 AI로 보고서 초벌 작업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정도"라며 "인공지능이 기초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수준이 되다 보니, RA 채용 역시 회사 입장에선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기존 RA 인력이 이탈하는 가운데, 신규 채용이 줄며 남은 인력의 노동강도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RA 1명이 평균 3~4명의 애널리스트를 보조하는 경우가 많다. 일부 중소형사에선 4~5명을 동시에 지원하는 상황도 있다고 한다.

    한 전직 RA는 "한창 바쁠 땐 5명의 애널리스트를 전담해 업무를 맡았었다"며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승진은 불투명하고 보상도 정체돼 있다 보니, 동기들 대부분이 이직을 고민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고강도·저보상 구조 속에서 RA들은 리서치센터 외 자산운용사나 VC 등 분석 역량을 요구하는 업권으로 이직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업계에서는 RA 출신을 실무 경험과 조직 적응력을 갖춘 실전형 인재로 평가받는 분위기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RA는 단순 보조 직무가 아니라 리서치센터 인력 생태계의 시작점"이라며 "RA들의 이탈이 이어지면 인재 순환 구조가 망가지며 결국 증권사의 리서치 역량 자체가 무너지게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