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주 해법으로 'EB 발행' 어려운 보험사…블록딜·PEF에 매각 검토
입력 25.10.14 07:00
소각 의무화 앞두고 셈법 복잡…EB 발행 제도상 어려워
보험사들 자사주 해법 막막…경영권 지분 취약 우려도
우호적인 투자자나 사모펀드에 매각하는 안도 거론돼
  • 국내 상장 보험사들이 자사주 활용 방안을 두고 고심하고 있다. 보험업 특성상 일반 기업처럼 자사주를 기초자산으로 한 교환사채(EB) 발행이 사실상 어렵기 때문이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 법안이 정기국회 통과를 앞둔 상황에서, 일부 보험사들은 관계가 우호적인 투자자나 사모펀드(PEF) 운용사 등에 매각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다.

    12일 투자업계에 따르면 최근 일부 보험사들은 자사주 처리 방향을 두고 여러 안들을 검토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배임죄 폐지와 함께 자사주 소각 의무화 추진에 속도를 낼 것으로 예상되면서, 보험사들은 매각을 통한 현금화나 지분 구조 재편 등 다양한 자사주 활용 방안을 검토하는 분위기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달 중 업계 의견을 수렴해 자사주 소각 의무화와 관련한 단일 법안을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해당 법안은 상법 3차 개정안에 포함돼 정기국회에서 처리될 전망이다. 현재 국회에는 김남근·민병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안, 차규근 조국혁신당 의원안, 김현정 민주당 의원안 등이 올라와 있으며, 소각 시한을 6개월에서 5년으로 두는 등 세부 내용이 달라 추가 조율이 필요하다는 관측이다. 논의가 본격화되면 기업들의 대응책 마련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미래에셋생명의 자사주 보유 비율은 26.29%로 30%에 육박하며, DB손해보험(15.19%), 한화생명(13.49%) 등 주요 보험사들도 상당한 물량을 보유하고 있다. 

  • 특히 보험사들은 사실상 EB 발행이 막혀 있다는 점에서 자사주 처리 방안을 두고 난처한 상황에 놓였다. 

    현재 상장사들이 자사주를 현금화하는 주요 수단으로 가장 선호하는 것은 EB다. 블록세일(시간 외 대량매매)의 경우 종가 대비 ±5% 범위 내에서만 가격을 정할 수 있어 할인 폭이 제한적이고, 거래 공시 이후 주가가 급락할 위험도 크다. 반면 EB는 채권 형태로 만기 시 원금이 보장되며, 교환권 행사 시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어 투자자 입장에서 상대적으로 매력적인 상품으로 평가된다. 

    이처럼 시장 수요가 EB에 몰리고 있지만, 보험사들은 이러한 방식을 활용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EB를 활용하기 어려운 이유는 제도적 제약 때문이다. 보험사의 사채 발행은 목적과 종류가 엄격히 제한돼 있다. 보험사는 재무건전성 기준 충족이나 유동성 유지를 위한 경우에만 자금 차입이 허용되며, 그 수단도 당좌차월·어음·환매조건부채권·후순위채·신종자본증권·그 밖에 금융위원회가 정해 고시한 방식 등으로 한정돼 있다. EB 발행에 관한 명확한 규정이 없어 법적으로 시도 자체가 어렵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보험사는 금융소비자 보호와 건전성 유지를 위해 자금 조달이 매우 제한적으로만 가능하다”며 “이 때문에 자사주를 처리하고 싶어도 EB 발행은 활용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EB 발행이 사실상 어려운 상황에서 보험사들은 블록세일을 통한 자사주 매각을 검토하고 있지만, 투자자 수요가 상대적으로 낮은 것으로 전해진다. 일부 보험사는 이마저도 쉽지 않다. 성장 과정에서 꾸준히 유상증자 등으로 자본을 확충해온 탓에 대주주 지분율이 비교적 낮은 곳이 많기 때문이다. 이 경우 자사주를 매각하면 대주주 우호 지분이 사라져 경영권이 취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우호적인 투자자를 찾아 지분 구조를 안정시키려는 시도가 불가피하다는 분석도 나오는 까닭이다. 

    현대해상과 DB손해보험 등 오너 일가가 최대주주인 보험사는 자사주를 활용해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왔다. DB손해보험의 경우 김남호 명예회장의 지분율은 9%에 불과하지만, 회사가 보유한 자사주는 전체의 15%에 달한다.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지만 실질적인 ‘우호 지분’ 역할을 하면서 대주주 지배력을 뒷받침해온 셈이다. 이런 구조적 특성 때문에 자사주 소각 혹은 매각이 곧바로 지배구조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도 업계가 부담을 느끼는 이유로 꼽힌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일부 보험사는 대주주 지분율이 높지 않기 때문에 자사주 소각으로 경영권이 취약해질 경우 적대적 M&A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며 “물론 대주주 적격성 심사가 있어 현실화 가능성은 낮지만, 보험사 역시 이런 리스크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않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우호적인 PEF에 자사주를 매각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으로 거론된다. 한 IB업계 관계자는 “보험사들이 자사주를 단순히 보유하기보다는 어떻게든 활용하려고 할 것”이라며 “최근 보험주 주가 흐름이 양호한 만큼, 우호적인 투자자와의 접점을 찾으려는 시도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