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후장대 산업된 인공지능(AI)…삼성전자·하이닉스 메모리도 '스페셜'해진다
입력 25.11.07 07:00
국가가 나서 AI 공장 짓는 시대…사실상 중후장대化
D램도 낸드도 병목…물량 부족하니 웃돈 주고 사야
메모리 산업 범용→스페셜티로 구조적 변화하는 중
전방 거품에도 노출 최소화…주가 목표치 계속 치솟아
  • SK하이닉스는 지난 10월29일 3분기 실적 발표회에서 "D램과 낸드 모두 내년 물량까지 솔드아웃"이라고 밝히고 메모리 반도체 슈퍼사이클(초호황) 진입을 공식화했다. 이튿날 삼성전자도 다소 신중한 어조였지만 같은 전망을 내놨다. 양사 발표를 종합하면 '앞으로 투자를 대폭 늘릴 건데, 그래도 시장 수요 따라가기 벅차다'로 정리된다. 

    실적 발표 직후 증권사들은 양사 목표주가를 공격적으로 올려잡고 있다. 삼성전자는 15만원, SK하이닉스는 70만원. 각각 현재 주가보다 40%, 20%가량 더 올라갈 수 있다고 내다본 것이다. 그리고 3일 삼성전자는 11만원대, SK하이닉스는 60만원대를 뚫었다.

    외국계 투자은행(IB)들은 국내사보다 이미 한발 앞서 공격적 목표를 설정해뒀다. 그러나 투자가들이 실제 주목하는 내용은 따로 있다. 왜 갑자기 이런 상황이 벌어졌고, 양사 판단이 틀리지 않는다면 도대체 앞으로 어디까지 이익이 늘어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변화는 이미 3개월여 전부터 예고됐다. 오픈AI는 지난 8월7일 GPT-5를 출시했다. 핵심 업데이트는 '심층 추론' 모델 도입이었다. 이전 모델들이 이미 학습한 정보를 기반으로 가볍게 답해왔다면 앞으로는 복잡한 요청에 맞춰 실시간으로 외부 정보를 참조, 추론해 답변하는 방식이 도입된 것이다. 한 달도 안 돼서 시장조사기관들은 "낸드 수급이 빡빡해졌다. 가격이 치솟는다"는 보고서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외국계 투자은행(IB) 한 반도체 연구원은 "AI 학습 때는 GPU 수십만장 연산 속도를 뒷받침할 D램이 병목을 일으켰으면, 추론 단계에선 필요한 정보를 근처에서 빨리 읽어들여서 질 좋은 결과물을 내놓는 게 중요해졌다"라며 "기존 HDD 서버로는 감당이 안 된다. 그러니 용량도 크고 빨리 읽어들이기 좋은 QLC eSS 중심으로 낸드 수요가 폭등하는 단계"라고 설명했다. 

    크게 두 가지 변화가 발생했다는 분석이 많다. 하나는 AI 산업이 점점 더 중후장대 산업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오픈AI나 구글, 앤스로픽, xAI 등 선두 업체는 이미 내년 AI 학습에 필요한 투자를 집행하는 동시에 다음 투자를 위한 펀딩을 진행하고 있다. 뒷단 서버 공급사들은 여기서 발생할 추론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기존 데이터센터(DC)를 교체하고 새 AI DC를 구축하는데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고 있다. 최근 D램, 낸드 가격이 치솟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평이다. AI 공장에 필요한 벽돌이 부족하면 웃돈을 쥐어주고서라도 확보하는 격이다. 

    지난 3년 동안 엔비디아 가속기(GPU)로 열심히 배운 AI들이 제대로 된 답변, 즉 추론 능력을 키우는 데에도 마찬가지로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기 시작한 셈이다. 실제로 최근 글로벌 IB들의 주된 고민거리 중 하나가 치솟는 AI 데이터센터(DC) 프로젝트로의 자금 중개 문제다. 기술 혁신보다도 자본집약적 인프라 구축이 경쟁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는 판단이 우세한 상황으로 풀이된다. 

    이 때문에 메모리 산업 자체가 범용에서 스페셜티(특화) 제품 영역으로 바뀌고 있다는 분석이 늘고 있다. 

    원래 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범용, 커머디티(상품) 시장으로 분류됐다. 삼성전자건 SK하이닉스건 마이크론이건 시장 수요 전망에 따라 성능 비슷한 반도체들을 쌓아두고 파는 방식에 가까웠다. HBM 등장 이후 D램 시장의 일부가 선주문 중심 스페셜티로 진입했지만 대형 고객사를 선점한 SK하이닉스만이 수혜를 독식했다. 

    현재는 범용 D램이나 낸드도 같은 변화를 겪고 있다. 낸드에서도 SK하이닉스가 최근 선 보인 고대역폭플래시(HBF)가 등장하기도 했지만, 일반 D램이나 낸드까지 구매 단위나 계약 방식이 스페셜티처럼 바뀌고 있다. 과거와 달리 AI 패권을 걸고 군비경쟁의 일환처럼 사들이는 반도체가 됐으니 고객사 요구 성능이나 물량 규모가 달라진 덕이다. SK하이닉스는 지난 실적 발표회에서 "일부 고객사는 2027년 물량까지 선주문 협의를 해오고 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메모리 산업 자체가 수백조 단위 중후장대 핵심 밸류체인에 편입되면서 D램, 낸드 구매도 HBM처럼 선수금, 장기 고정가격 기반 계약 형태로 전환 중"이라며 "메모리는 3사 과점 구도인 데다 팹(fab) 증설이 쉬운 것도 아니라서 SK하이닉스나 삼성전자나 선수주, 후증설 형태로 스페셜티화 구도를 더 강하게 밀어붙일 것으로 본다"라고 전망했다. 

    산업의 성격이 바뀌고 있으니 당분간 공급사들의 실적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거라는 전망에는 별 이견이 없는 분위기다. 지금도 증권사들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내년 이익 전망을 상향 조정하고 있다. 일각에선 늘어날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양사가 너무 빨리 투자를 늘리면 어떡하느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계약 방식이 바뀌면서 이런 걱정도 일부 해소되고 있다. 

    대형 증권사 리서치센터 한 임원은 "이번 AI 사이클 자체는 미래 트래픽 성장을 전제로 투자를 늘리고 있어서 여전히 거품 걱정이 있지만 메모리 반도체는 여기서도 노출을 최소화할 수 있는 산업"이라며 "최근 주가 상승세도 그렇지만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에 대한 전망이 기대 이상으로 좋아서 톤을 조정하기 힘들 정도"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