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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정부가 내년도 예산안을 통해 'AI 대전환'을 전면에 내세우며 총 150조원의 국민성장펀드 조성을 예고했다. 10조원 규모의 AI 예산, 역대 최대 수준의 연구개발(R&D) 투자, 주요 그룹의 GPU 확보 등 구체적 청사진도 제시됐다.
시장에서는 "투자할 곳이 없다"는 자조가 나온다. 대규모 자금이 한꺼번에 풀리지만, 실질적 투자처나 검증된 사업 모델이 부재하다는 지적이다.
"AI? 돈 넣을 곳이 없다"
최근 사모펀드(PEF)업계 모임에서 나온 화두다. 다들 풀리는 돈주머니를 바라보지만 막상 투자할 만한 '검증된' 딜이 부족해 난처한 상황이라는 얘기다.
시장 구조 자체가 엔비디아 중심으로 재편된 상황도 투자 집행의 불안 요소다. 엔비디아가 GPU 공급 대상을 정하면 그 기업은 사실상 AI 인증마크를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올 하반기 국내에 공급된 GPU(H100) 약 26만장 중 대부분은 SK하이닉스·네이버·카카오·KT 등 대형 사업자에 돌아갔다. 스타트업이나 중견 IT기업은 배정받기조차 어렵다.
한 VC 심사역은 "엔비디아가 GPU를 공급하는 순간 투자자들은 그 회사를 확실한 플레이어로 본다"며 "결국 AI 시장의 질서는 민간이 아니라 엔비디아가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정부는 15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를 내세워 향후 5년간 첨단전략산업에 집중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회 시정연설에서도 "AI 시대를 여는 대한민국의 첫 예산"이라고 강조했다. 내년도 기준으로 예산 총액은 728조원, 그중 AI 관련 예산은 10조1000억원 규모다. 올해(3조3000억원) 대비 세 배 이상 늘었다. 연구개발 투자 규모도 35조3000억원으로 약 20% 확대됐다.
AI와 반도체 인프라 방향의 일부 기업은 거래가 진행 중이지만 밸류에이션(가치평가)이 최근 급등하면서 투자자간 시각차가 있다. 전환사채, 신주인수권부사채 등 메자닌 투자도 주가 변동성 탓에 수익을 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대부분 운용사들이 사실상 관망 상태에 빠졌다.
한 중견 PEF 대표는 "산업은행이 70명을 전담 조직을 신설해도 GP(운용사) 입장에서는 그 돈을 어디에 쏴야 할지 모르겠다"며 "AI로 한정하면 국내에는 뚜렷한 투자대상이 없고, 몸값만 높아진 기업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연기금·공제회 등 국내 주요 LP들도 비슷한 입장이다. 정부의 기조상 AI 투자 확대를 외면하기 어렵지만, 실제 투자처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 밸류에이션이 높은 성장기업과 인프라성 자산(데이터센터·전력·냉각 설비 등) 간의 괴리가 커, 투자 전략 수립이 더욱 어려워졌다는 지적이다.
한 공제회 관계자는 "AI 섹터 주가가 잘 가기도 하고, 정부가 밀어주니 우리도 포트폴리오 상 비중을 늘릴 수밖에 없다"면서도 "몇 년 전 바이오붐 때처럼 회사 사업계획에 AI 글자만 붙이면 투자 받는 기업들이 많아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현재 정부와 국회, 산업계 모두 "AI 슈퍼사이클에 올라타야 한다"는 공감대는 형성된 상태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AI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확장에 속도를 내고 네이버·삼성SDS가 엔비디아와 손잡고 GPU·클라우드 인프라 확대 계획을 발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다만 AI 투자라는 이름 아래 자금이 실제 어디로 흘러갈지는 불투명하다. 민간자본이 주도해야 할 영역에서 정부가 방향을 제시하면, 오히려 효율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반복된 정책형 펀드로 시장의 피로감은 크다.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펀드', 박근혜 정부의 '통일대박펀드', 문재인 정부의 '뉴딜펀드' 모두 초반 흥행 후 동력을 잃었다. 실제 뉴딜펀드만 해도 5개 펀드의 5개년 평균 수익률은 1%대에 머물렀다. 이번 'AI 150조 펀드'가 과거와 달리 실질적 성과로 이어지려면, 정부가 자금의 마중물 역할까지만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한 주식 운용역은 "정부가 이 기업, 이 섹터에 투자하라는 식으로 접근하면 시장은 또다시 '정책형 펀드'의 전철을 밟게 된다"며 "이번에는 정부가 자금의 마중물 역할까지만 하고, 이후는 민간이 선별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정부가 추진 중인 150조 펀드는 국민연금·산업은행·기업은행 등 정책금융기관이 출자자로 참여하고, 민간 운용사가 위탁을 맡는 구조로 설계되고 있다. 다만 실제 AI 관련 기업의 성장 단계, 기술 검증 수준, 시장 수요 등을 감안하면 대형 펀드의 소화력이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앞선 PEF 대표는 "AIDC(AI데이터센터) 구축, 기자재, 에너지 등 인프라 단으로까지 투자 범위를 넓히지 않으면 150조원은 소화가 어렵다"며 "다만 수익률과 기간 등 시뮬레이션을 돌려봐야 해서 섣불리 투자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지금의 AI 투자는 정책이 자본을 앞서고, 자본은 기술을 앞선 채 군불만 피워지는 단계에 가깝다. 엔비디아 GPU 26만개 확보, 네이버 세종 데이터센터 증설, 삼성SDS의 AI 클라우드 확장 등 구체적 움직임이 있지만, 대부분은 2026년 이후 본격화된다. 정부의 정책과 자본은 앞서 있지만 실물 투자와 기술 개발, 규제 정비는 아직 초기 단계라는 지적이다.
AI를 둘러싼 기대감은 정부 정책, 산업 트렌드, 주가 상승이 맞물리며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투자금이 어디에, 누구를 통해, 어떤 구조로 쓰이느냐는 별개의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 증권사 IPO 담당은 "AI, 반도체 등 특정 섹터에 대해 거래소가 우호적 신호를 보내고 있지만, 실제 상장할 만한 펀더멘탈을 가진 회사는 많지 않다"며 "AI는 비전은 크지만, 현 시점에서 실적을 보여주는 기업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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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5년 11월 05일 07:00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