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고개드는 행동주의 공세…'방어' 먹거리 기대하는 자문시장
입력 25.11.11 07:00
기업 지배구조 취약한 한국, 행동주의 확산세
소액주주 보호 정책 강화, 기업들 부담 커져
글로벌 IB '행동주의 방어' 역량 강화 움직임
한국도 수요 늘 듯…로펌·회계펌도 시장 주목
  • 연말이 다가오면서 행동주의 펀드들의 행보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들이 소수 지분으로 지배구조와 주주 이익을 문제 삼기 쉬워진 반면, 상대편인 기업과 경영진은 공세에 고심이 깊어지는 모습이다. 앞으로 행동주의의 보폭이 더 넓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투자은행(IB) 등 자문사들은 공세를 방어하는 일감이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국은 행동주의 확산세가 가파른 곳 중 하나다. 지분율이 높지 않은 오너 일가가 경영권을 가진 기업이 많다. 기업가치나 주가 상승보다 경영권 유지나 승계에 집중하다 보니 소액주주들의 권리가 보호받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지배구조나 이익 분배 문제를 지적하는 행동주의의 목소리가 커졌다.

    영국 리서치 업체 딜리전트 마켓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행동주의 캠페인 대상 기업은 2020년 10곳에서 2023년 73곳으로 늘었다. 올해도 연말로 접어들면서 굵직한 캠페인들이 벌어지는 양상이다.

    지난달 영국 팰리서캐피탈은 LG화학을 상대로 캠페인에 나섰다. LG화학 주식이 국내 대기업 중 가장 저조한 수준으로 거래되고 있다며 '수익률을 지향하는 강력한 자본 배분 체계'를 시행하고 'LG에너지솔루션 지분을 활용해 자사주를 매입'하라고 요구했다. 팰리서캐피탈은 수 년 전부터 삼성물산, SK스퀘어 상대로도 행동주의를 편 바 있다.

    한국 내 시장 환경은 행동주의가 활약하기 유리해지고 있다. 전자위임장 제도가 도입되고 액트(ACT)와 같은 소액주주 플랫폼이 생기면서 적당한 명분만 있으면 소수 지분만 가지고도 세몰이를 하며 회사를 압박하기 용이해졌다.

    정책 변화는 더 두드러진다. 이재명 정부 들어 소액주주 보호 정책과 법안이 쏟아지고 있다. 올해 두 차례에 걸친 상법 개정을 통해 이사의 충실의무가 '회사 및 주주'로 확대됐고, 집중투표제도 의무화됐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담은 3차 상법 개정안이 논의 중이다.

    얼라인파트너스는 지난달 스틱인베스트먼트 지분 보유 목적을 '일반 투자'에서 '경영권 영향'으로 변경했다. 회사 이사회가 자기주식을 임의로 처분하려 한다며 이는 향후 제3차 상법 개정의 적용을 회피하려는 의도로 비춰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3일 스틱인베스트먼트는 자기주식을 활용해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나 확정적인 계획은 없다고 공시했다.

    기업의 오너나 경영진 입장에선 소액주주에 공세의 빌미를 주거나 명분 싸움에서 밀리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해졌다. 분쟁이 일어날 경우 대응 논리를 찾고 중립 투자자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도 중요하다. 행동주의나 주주운동의 주체와 양상이 복잡해지면서 자문사들도 이를 전문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한 법무법인 파트너 변호사는 "이사회나 경영진이 횡령배임 문제로 유죄 판결을 받으면 주주들의 손해배상 청구를 방어하기 쉽지 않다"며 "3%룰과 집중투표제까지 감안하면 앞으로 소액주주들이 이사회를 직접 압박할 수단은 더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한 고민은 해외에서 먼저 나타났다. 미국은 올해 특히 행동주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바클레이즈 분석에 따르면 3분기까지 진행된 캠페인은 191건이다. 올해 기존 최고 기록(2018년, 249건)을 넘어설 전망이다. 일본도 행동주의 성장세가 가장 가파른 곳으로 꼽힌다. 예년 매월 2~3건이던 캠페인이 올해는 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수 년 사이 캠페인 방어 자문 수요가 커졌다.

    JP모건은 올해 행동주의 대응 전략을 강화하기 위해 기업지배구조 전문가 두 명을 매니징디렉터(MD)로 영입했다. 골드만삭스는 연초 EMEA(유럽·중동·아프리카) 지역 내 행동주의 및 주주자문(Activism and Shareholder Advisory) 부문 수장을 승진시켰다. 다른 IB들도 행동주의 대상 기업 측 자문을 강화하는 모습이다. 새 수익 영역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한국의 경우 IB가 당장 행동주의 방어 영역에서 큰돈을 벌기 어려울 수 있다. 다만 행동주의 방어는 의사결정권자인 오너나 경영진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고, 이는 다른 굵직한 자문 수임으로 이어가는 데 유리하다. 해외 주주 비중이 높은 기업은 '대외 여론전'에서 IB의 도움을 받고 만족감을 표하기도 한다.

    한 IB 관계자는 "일본의 경우 3~4년 전만 해도 행동주의 방어가 필요하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는데 작년 캠페인이 크게 늘어나면서 자문 수요가 많아졌다"며 "오너의 경영권이 취약한 기업이 많은 한국에서도 행동주의 방어 일감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법무법인과 회계법인들도 행동주의 방어에 공을 들이고 있다. 주주총회를 대비해 법적, 회계적 논리를 제공하면서 파생 자문 일감까지 노리는 양상이다. 율촌과 태평양은 올해 각각 '기업지배구조센터'와 '거버넌스 솔루션 센터'를 출범했다 지난달 광장 M&A 포럼에선 상법 개정이 경영권 분쟁에 미칠 영향이 중점적으로 다뤄졌다. 회계법인들도 '거버넌스' 관련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다른 법무법인 파트너 변호사는 "소액주주 플랫폼이 주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자위임장 도입 후 힘이 세진 것은 사실"이라며 "소액주주의 공세가 심해지다 보니 M&A 자문 변호사들도 기업을 도와 방어 논리를 짜는 업무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