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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만난 다음날 한국 정부와 주요 기업에 가속기(GPU) 26만장을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삼성과 현대차 외 SK까지 국내 3대 제조 대기업 그룹사가 단숨에 GPU 5만장 구매 대기열에 합류하게 됐다.
시장에선 엔비디아가 방한 세일즈를 했다기보다 각사가 수십년 축적한 제조업 데이터를 구매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연산력(GPU)을 나눠줄 테니 데이터를 공유하는 식으로 동맹전선을 구축하고 피지컬 AI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한국으로선 돈 주고도 못 구할 GPU를 확보해서 좋고, 엔비디아는 다음 먹거리를 위한 테스트베드이자 공급망 동맹을 꾸려 실익을 챙겼다는 평이다.
거대한 연합전선에 왜 LG그룹이 이름만 빠져 있느냐를 두고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LG는 국내 대기업 중 가장 발 빠르게 AI를 새 먹거리로 점지한 편에 속한다. 자체 개발한 모델 '엑사원'이 공개된 지도 벌써 4년여가 지났다. 토종 IT 플랫폼보다도 진입 시점이 빠르다. 현재 삼성·현대차·SK 등 연합군이 구상하는 '제조 AI' 비전 역시 LG전자가 작년에 내놓은 청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다. 판이 커지기 시작한 AI 데이터센터(DC) 등 인프라 사업도 올초 LG CNS가 비상계엄 한파를 뚫고 기업공개(IPO)에 나설 때 중장기 계획으로 등장했었다. 서버향 냉난방공조(HVAC)나 에너지저장장치(ESS) 등 핵심 솔루션 사업에서도 LG그룹 업력이 가장 길다.
글로벌 증시를 들었다 놨다 하는 이슈 대부분에 LG가 이미 발을 걸치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존재감이 흐릿하다는 관전평이 적지 않다. 이번 GPU 동맹에서 LG그룹이 빠져 있으니 그런 시각이 더 굳어진다. LG전자도 서둘러 엔비디아와 협력을 강화할 것이라는 입장을 내놓고 있지만 주변부를 겉도는 듯하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LG전자가 어떤 형태로 엔비디아와 협력하건 이번 GPU 동맹에 빠지면 결국 주변부 아니겠느냐 하는 시선이 있다"라며 "GPU 확보 문제는 단순히 주목도 싸움에서 밀려나는 정도가 아니라 중장기 주도권을 상실하는 분기점이 될 수도 있다"라고 설명했다.
여러 분석이 오가는데, LG그룹이 자체 AI 역량에 자신이 있어서라는 시각도 전해진다. 엑사원을 비롯해 일찍이 꾸려둔 제조 AI 청사진도 있으니, GPU 받자고 자체 데이터를 넘기지 않아도 주도권 싸움을 지속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아니겠냐는 것이다. 실제로 산업계 내에서도 이번 GPU 동맹에 대한 우려가 없지 않다. 수십년 공장을 굴리며 축적한 노하우를 넘겼다가 국내 대기업들이 첨단제조업에서 구축한 해자마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룹 사업 포트폴리오에서 확실한 구심점이 부족해 밀려난 거란 분석도 있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는 제조업력도 길지만 엔비디아 사업에 필수적인 메모리 반도체 파트너다. 현대차그룹은 완성차부터 로보틱스까지 피지컬 AI 구현에 필수적인 사업을 두루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테슬라를 견제해야 한다는 지점에서 엔비디아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다. AI 밸류체인에서 메모리, 완성차, 로보틱스는 대체로 LG그룹 보유 사업들에 비해 무게감이 큰 편에 속한다.
결국 불참한 거냐, 받아들여지지 못한 거냐 하는 논의인데, 아예 다른 접근도 있다. LG그룹이 현재 판세를 잘못 읽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장 투자업계 내에서 LG그룹 수뇌부 차원의 오판 가능성에 대한 얘기가 오르내리고 있다.
대형 증권사 한 임원은 "그룹 차원에서 리밸런싱이나 비용 절감이 화두이다 보니 젠슨 황과의 회동 자리를 GPU 세일즈 미팅 정도로 착각한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라며 "경쟁사에선 이번 GPU 동맹을 그룹사 전체 미래가 달린 문제로 보고 오너들이 전면에 나섰다 보니 여러모로 비교하는 시선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라고 전했다.
실제로 LG그룹이 어떤 청사진을 그리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이가 드물다. 5~7년 전 미래 모빌리티를 중심으로 시장이 격변할 때와 겹쳐 보인다는 평도 나온다. 당시 LG전자는 파워트레인, 전장, 배터리, 센서, 첨단소재, 디스플레이까지 관련 기술을 두루 갖추고 있었으나 전기차 같은 핵심 기반이 없어 부품사 중 하나로 머무른다는 평가를 받았다. 현재도 그룹의 전략 인식이 개별 기술 투자 수준에 머물러 있고 AI 산업 전체로는 뻗어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자문시장 한 관계자는 "삼성이나 SK, 현대차가 지난 수년 크게 부침을 겪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체급이 크게 오르면서 사실상 3강 구도가 됐다"라며 "LG그룹은 딱히 어렵지도, 좋지도 않은 채로 정체 상태를 유지 중이다. AI 시대 초입에서 이런 상태를 반복되면 차이가 더 크게 벌어질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취재노트
66년 제조 노하우 쥔 LG그룹…AI 연합전선에선 안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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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5년 11월 10일 10:57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