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환율에 서학개미 정조준…실태점검 앞두고 당혹스런 증권사들
입력 25.12.02 11:27
외환당국·금투협·금감원 '삼중 압박'에에 긴장 고조
'소비자 보호' 명분에도…현장선 사실상 '규제'로 인식
연말 해외주식 이벤트 시즌 직격탄?… 우려 커지는 업계
고환율 구조적 요인엔 침묵…증권사 영업 위축도 거론
  • 원·달러 환율이 1500원 턱밑까지 치솟자 정부와 금융당국이 '서학개미(해외주식 개인투자자)'와 이를 중개하는 증권사를 사실상 전방위로 조이고 있다. 겉으로는 '규제는 아니다'라며 선을 긋지만, 한 달 새 외환당국·금융투자협회·금감원 등이 잇따라 증권사들을 불러 세우면서 업계에선 실질적 규제의 앞단이라는 불만이 거세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1일부터 증권사의 마케팅이 '서학개미'의 과도한 투자를 부추기는지에 대한 집중 점검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이찬진 금감원장은 같은 날 기자간담회에서 "서학개미 투자권 규제는 전혀 아니다. 소비자 보호 차원의 점검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표면적으로는 '영업행태 점검'이지만, 업계의 시선은 다르다.

    한 증권사 임원은 "해외주식 양도세 강화, 서학개미 책임론이 연달아 나온 뒤 곧장 실태점검 얘기가 나왔다"라며 "말로는 규제가 아니라고 하지만, 현장에선 '이제 쿼터제나 레버리지 제한으로 가려는 신호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당국의 '증권사 소집'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원·달러 환율이 1470원을 돌파하던 11월 21일, 기획재정부·한국은행·금감원 등 외환당국은 외환시장협의회 소속 9개 증권사 외환 담당자들을 긴급 소집해 환전 구조 점검에 나섰다. 시중은행이나 수출기업이 아닌 증권사만 별도로 불러 모은 건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이 자리에서 당국은 개장 직후(국내 9시)로 환전 수요가 쏠리는 관행을 문제 삼으며 ▲일일 평균 환율(MAR, 시장평균환율)로 일괄 정산하는 방안 ▲주문 시점별 실시간 환전 확대 등 '쏠림 완화' 대책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개장 직후 대규모 달러 매수 주문이 환율을 밀어 올리는 구조를 고치라는 취지다.

    그러나 회의에 참석한 증권사들은 이종통화 적용 문제, 미국 장 마감(T+1) 결제 시차, 야간 환전 리스크 등을 이유로 난색을 표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현실적인 결제·리스크 구조는 놔둔 채 '타이밍만 바꾸라'고 하면 우리(증권사)보고 환율 트레이딩을 하라는 얘기"라며 "나중에 손실이라도 나면 또 '왜 투기하느냐'고 지적할 것 아니냐"고 꼬집었다.

    외환당국 회의에 이어 지난주에는 금융투자협회가 주요 증권사 해외주식 담당자들을 다시 한 번 소집해 고환율 대응 방향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국에 이어 협회를 통해서도 우회적으로 증권사들에 대한 압박이 가해지는 모양새다.

    이런 가운데 금감원이 '해외투자 실태점검'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시 증권사에 칼날을 겨누면서 업계 불안감은 정점을 찍었다.

    한 중형 증권사 관계자는 "한 달 사이 세 번이나 호출을 받았는데 이걸 두고 '규제는 아니다'라고 말하면 누가 믿겠느냐"라며 "해외주식 양도세 인상은 아니더라도, 레버리지·신용공여·마케팅 쪽에서 틀어막는 식의 규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업계에서는 메리츠증권의 위기의식이 가장 클 것으로 보고 있다. 메리츠증권은 현재 '완전 제로 수수료' 정책을 내세워 'Super365 계좌' 보유 고객을 대상으로 국내·미국 주식 매매 수수료는 물론 USD 환전 수수료까지 전면 면제해준다. 유관기관 수수료(거래소·예탁결제원 수수료)까지 메리츠가 부담한다.

    이 조건 덕분에 많은 서학개미가 사실상 '매매기준가'로 달러를 매수하는 것이 가능했고, 해외주식 약정금액도 가파르게 상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배경 탓에 메리츠는 당국의 외환·환전 구조 점검과 실태 조사 움직임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처지란 평가다.

    현재 시점에서는 증권사들이 연말 해외주식 관련 이벤트를 대거 중단하거나 수정하려는 움직임은 뚜렷하지 않다. 다만 당국의 점검이 본격화하면 상황이 달라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아직까지는 당국이 검사 협조 공문도 보내오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어떤 지점을 중점적으로 점검할지 모르는 상황"이라며 "선제적으로 움직일 수는 없기 때문에 향후 추이를 지켜보면서 대응해 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금감원의 '설명 의무 점검' 취지 자체는 부인하기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레버리지·인버스·원금 비보장형 해외 ETF 및 옵션성 상품이 크게 늘면서, 일부 투자자들이 환리스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고위험 상품에 진입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학개미 열풍 이후 영업점·MTS에서 해외 레버리지 상품을 '달러도 벌고 수익률도 올리는 상품'처럼 설명한 사례를 종종 찾아볼 수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에 당국이 위험고지·적합성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는지 들여다보자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 없다는 평가도 나온다.

    다만 문제는 '언제'와 '어떻게'다. 국내 기관투자가들은 물론, 해외증권투자를 확대해온 자산운용사·연기금·보험사들이 최근 대외금융자산을 가장 공격적으로 늘려왔다는 통계가 나오는 상황에서, 증권사에 대한 점검은 자칫 해외주식 영업 위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고환율 국면에서 특정 투자자군을 원인 제공자로 지목한 뒤 곧바로 그 대상에 대한 실태점검을 예고하면 시장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뻔하다"라며 "정말 소비자 보호 목적이라면 고환율 이슈와 분리해서, 보다 상시적인 테마 점검으로 가져갔어야 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