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늘리고, 한화·LG·롯데 줄이고…엇갈린 그룹별 공모채 발행 전략
입력 25.12.18 07:00
SK는 상반기 공모채 선제 조달…발행 확대에 무게
한화·LG·롯데는 금리 부담 속 PRS·EB 등으로 우회
하반기 금리 급등에 SK·KCC글라스 발행 연기 잇따라
내년 90조원 만기 앞두고 기업별 조달 전략 더 갈려
  • 불확실한 국면 속에서 출발한 올해 회사채 시장은 상반기 저금리 기조를 발판 삼아 연간 86조원 규모의 역대 최대 발행량을 기록했다. 겉으로 보면 호황이지만, 시장 참여자들의 체감 온도는 달랐다. 상반기 우량 기업을 중심으로 선제적 조달이 몰리며 외형이 커졌을 뿐, 하반기 들어서는 금리 급등과 크레딧 스프레드 확대로 발행 여건이 급격히 악화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과정에서 기업별 조달 전략은 뚜렷하게 갈렸다.

    올해 SK그룹은 공모 회사채 발행을 크게 늘린 반면, 한화·롯데·LG 등은 회사채보다는 주가수익스와프(PRS), 사모채, 전환사채(EB·CB), 신종자본증권 등 사모·구조화 조달 비중을 확대했다. 같은 시장 환경 속에서도 기업별로 '찍은 곳'과 '피한 곳'이 나뉜 셈이다.

    공모채 발행 늘린 SK그룹…투자·차환 수요가 만든 선택

    올해 SK그룹의 연간 공모 회사채 발행 규모는 9조7190억원으로, 9조8900억원을 기록했던 2023년 수준을 거의 회복했다. 지난해 발행액(7조3000억원)과 비교하면 2조원 이상 늘어난 수치다. 3조6120억원을 발행해 2위에 오른 한화그룹과 비교하면 격차는 3배에 달한다.

    지난해부터 고강도 리밸런싱을 추진해 온 SK그룹은 한동안 회사채 발행을 줄여왔지만, 올해 들어 조달 수요가 다시 확대됐다. 반도체 업황 회복 국면에서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투자 계획이 늘어난 데다, 과거 발행분 만기가 도래하며 차환 수요가 겹쳤다. 금리 부담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자금을 한 번에 조달할 수 있는 수단으로 공모 회사채가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계열사별로는 SK이노베이션이 올해 4월 8000억원, 9월 6000억원 등 연중 두 차례 회사채를 발행했다. 지주사인 SK㈜도 3월(4300억원), 5월(3800억원), 11월(3900억원) 연이어 자금을 조달했다. SK하이닉스는 1월 7000억원을 발행하며 연초 시장을 열었고, SK텔레콤과 SK인천석유화학 역시 연중 발행을 이어갔다.

    SK그룹이 공모채만 고집한 것은 아니다. 올해 8월에는 SK이노베이션이 SK온에 대해 2조원 규모의 PRS와 유상증자를 병행하며 계열사 지원에 나섰다. 공모채로 외형을 키우되, 재무 부담 관리가 필요한 구간에서는 주식연계 조달과 증자를 병행하는 '혼합 전략'을 택한 셈이다.

    한 증권사 기업금융 관계자는 "대규모 투자와 차환이 동시에 필요한 상황에서는 금리 부담이 있어도 공모채가 가장 확실한 수단"이라며 "비록 SK그룹이 하이닉스 외엔 실적 개선세가 뚜렷하지 않지만, 석유화학 업종에서 회사채를 발행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기업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한화·롯데·LG, 공모 대신 구조화 조달로 방향 전환

    한화·롯데·LG그룹 등은 회사채 발행을 줄이고 사모·구조화 조달로 방향을 틀었다. 금리 급등 국면에서 공모채 발행 시 요구 금리가 민평 대비 크게 높아지자, 굳이 비싼 금리를 감수할 필요가 없다는 내부 판단이 작용했다는 평가다.

    한화그룹은 올해 회사채 발행 규모가 3조6000억원대로, 지난해(3조8000억원)보다 소폭 감소했다. 대신 한화솔루션은 5월 독일 신재생에너지 자회사(Q Energy Solutions) 지분 일부를 활용해 5000억원 규모의 PRS를 발행했다. 

    연말에는 한화토탈이 5000억원 규모의 신종자본증권을 조달했다. 한화솔루션은 지난해에도 신종자본증권으로 7000억원을 발행한 바 있다. 석유화학 업황 부진 속에서 공모채 대신 자본성·주식연계 조달을 선택하는 흐름이 이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 롯데그룹 역시 회사채 발행이 예전만큼 원활하지 않다는 시장 평가 속에 대안 조달을 늘렸다. 올해 6월에는 롯데지주가 롯데글로벌로지스 지분을 활용해 PRS로 약 1000억원을 조달했고, 9월에는 500억원 규모의 사모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했다. 11월에는 롯데케미칼이 6600억원 규모의 PRS 리파이낸싱을 진행했고, 롯데건설도 7000억원 규모의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했다.

    일부 계열사들이 공모 회사채 시장 복귀를 타진했지만, 시장 반응은 녹록지 않았다. 롯데건설은 올해 회사채 수요예측에 나섰으나 전량 미매각을 기록했고, 총액인수 계약에 따라 주관사단이 물량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했다. 비교적 높은 금리를 제시했음에도 기관 수요를 충분히 끌어내지 못했다는 평가다.

    롯데케미칼 역시 지난해 말 기한이익상실(EOD) 우려 이후 공모채 발행을 검토해왔지만, 실제 조달은 PRS와 유동화 중심으로 이뤄졌다. 카드대금채권 유동화 등을 통해 유동성을 확보하고 있는 가운데, 신용평가사들은 해당 유동화 금액 역시 차입금 성격을 감안해 신용도 평가에 반영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상태다.

    LG그룹은 핵심 계열사 지분을 활용한 조달에 나섰다. LG화학은 상반기 LG에너지솔루션을 대상으로 10억달러 규모의 EB를 발행했고, 11월에는 LG에너지솔루션 보통주를 활용한 3년 만기 PRS로 2조원을 조달했다. 공모채 대신 주식연계 조달을 통해 금리 부담과 재무비율 관리를 동시에 고려한 선택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결국 기업별 조달 전략의 차이는 재무 여력과 상황 차이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다. 대규모 투자와 차환이 동시에 필요한 기업은 금리 부담에도 공모채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반면, 여력이 있는 기업들은 PRS·EB·신종자본증권 등 대안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도 속하지 못한 일부 기업은 발행 시점을 아예 늦추는 전략을 택했다. 포스코그룹은 지난해 발행을 올해로 이연하며 금리 레벨을 최대한 낮추는 데 방점을 찍었다. 주식성·구조화 조달 여력이 제한적인 한진그룹은 상대적으로 정공법인 회사채 조달을 선택했다.

    하반기 들어 시장은 다시 급격히 냉각됐다. 국고채 금리가 빠르게 오르고 크레딧 스프레드가 확대되면서, 우량 기업들조차 민평 대비 높은 금리를 요구받는 사례가 잇따랐다. SK브로드밴드, SK텔레콤, KCC글라스 등은 발행을 연기하거나 시점을 재검토했다. 연초를 앞두고 '누가 먼저 찍느냐'를 두고 시장의 눈치 보기가 이어지고 있다는 전언도 나온다.

    내년 회사채 만기 부담도 변수다. 내년 1월과 2월에만 각각 11조4500억원, 12조6600억원의 회사채 만기가 도래하며, 연간 만기 규모는 91조원을 웃돈다.

    한 증권사 임원은 "올해는 발행 규모 자체보다 어떤 기업이 어떤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했는지가 더 중요했던 시점"이라며 "금리 환경에 따라 내년에도 기업별 조달 전략의 차별화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