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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개미의 투자권을 규제하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소비자 보호 차원의 점검일 뿐이다."
금융감독원이 증권사 해외주식 영업 실태 점검에 착수하던 날,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선을 그었다. 해외투자 자체를 막겠다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규제를 도입하겠다는 뜻도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문제 삼는 대상은 수수료 무료, 환율 우대, 거래 지원금 등 현금성 이벤트를 앞세운 과도한 마케팅 관행이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형식적으로만 보면 맞는 말이다. 이번 점검과 관련해 법령이 개정된 것도 없고, 행정처분이 발표된 것도 없다. 해외주식 거래를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조치가 나온 것도 아니다. 점검은 여전히 진행 중인 단계다. 그럼에도 불구, 당국의 점검이 시작된 이후 해외투자 시장의 움직임은 설명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미래에셋증권과 삼성증권은 해외주식 신규 이벤트를 전면 중단했고, 키움증권과 토스증권은 거래 지원금·수수료 환급 프로모션을 조기 종료했다. 한국투자증권과 유진투자증권은 해외주식 입고 이벤트를 내렸고, 메리츠증권 역시 일부 이벤트를 예정 시점보다 앞당겨 종료했다. 해외주식 마케팅 경쟁의 중심에 있던 증권사들이 거의 같은 시점에 같은 선택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시장에서는 이를 '자율 조정'이라기보다, 당국의 점검 기조에 대한 선제적 대응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명시적인 규제는 없었지만, 시장은 이를 규제에 준하는 신호로 해석했다.
이 같은 반응은 우연이라기보다, 점검이 이뤄진 맥락과 전달 방식이 함께 작용한 결과에 가깝다. 금융당국이 증권사 해외투자 영업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시점은 원·달러 환율이 1470원을 넘어선 직후였다. 연말을 앞두고 환율이 좀처럼 안정되지 않자, 당국 내부에서는 개인 해외투자 급증이 외환 수급을 흔드는 요인 중 하나라는 문제의식이 빠르게 공유됐다. '서학개미'라는 표현이 다시 등장한 것도 이 같은 흐름과 맞닿아 있다.
점검의 출발점은 해외주식 거래 비중이 큰 대형 증권사와 플랫폼 증권사들이었다. 단순한 서면 점검을 넘어 일부 증권사 경영진을 직접 불러 마케팅 관행을 들여다봤고, 현금성 이벤트 중심의 경쟁이 투자 판단을 왜곡할 수 있다는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당국은 개인 해외주식 계좌 중 절반가량이 손실 상태에 놓여 있다는 내부 통계를 언급했고, 동시에 증권사들의 해외주식 위탁매매 수수료와 환전 수수료 수익이 올해 들어 빠르게 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과정에서 '투자자는 잃고, 증권사는 벌었다'는 구도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소비자 보호'라는 명목을 전면에 내세우기 위한 당국의 의도가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점검의 메시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당국은 '과당경쟁'이라는 표현을 반복했고, 일부 증권사에는 "위법 소지가 확인될 경우 해외주식 영업 중단까지 검토할 수 있다"는 경고성 메시지도 전달됐다. 법적으로 명시된 금지 조항은 없었지만, 어디까지가 허용 범위인지에 대한 경계선은 충분히 제시된 셈이다.
증권사 입장에서 이 신호를 가볍게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해외주식 이벤트를 유지해 얻는 추가 수익보다, 감독당국의 문제 제기를 무시했다는 인상을 남길 경우 감수해야 할 리스크가 훨씬 큰 까닭이다. 규제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아도, 감독당국이 공개적으로 문제 삼은 영역에 계속 머무르는 선택지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점검'은 규제에 준하는 효과를 낳았다.
이번 사안이 특히 민감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시기적 요인도 크다. 해외주식 마케팅 점검은 환율이 1470원 선을 넘나들던 국면과 맞물려 진행되고 있다. 시장에서는 이를 소비자 보호라는 설명만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달러 수요를 자극하는 개인 해외투자 흐름을 완화하려는 의도가 함께 깔려 있다는 해석이 뒤따른다. 실제로 당국 내부에서도 개인 해외투자가 환율 불안의 한 축이라는 인식이 공유돼 왔다.
문제는 이런 정책 신호가 전달되는 과정에서도 환율 흐름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점검이 진행 중인 현재 시점에서도 원·달러 환율은 1480원 안팎에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글로벌 달러 강세와 엔화 약세, 외국인 자금 흐름 등 구조적 요인이 환율을 끌어올리는 상황에서, 개인 투자 행태를 조정하는 방식의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면 개인투자자가 체감하는 변화는 비교적 분명하다. 해외주식 이벤트가 사라지면서 환율 우대와 수수료 경쟁은 약해졌고, 투자 환경은 오히려 불리해질 가능성이 커졌다. 해외투자를 막지는 않되, 조건만 나빠지는 구조다. 투자 판단의 책임은 개인에게 남아 있지만, 비용 부담은 더 커질 수 있다. '소비자 보호'라는 말과 실제 체감 사이의 간극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환율은 숫자지만, 정책은 신호다. 시장은 당국의 설명보다 그 설명이 만들어내는 행동의 변화를 먼저 읽는다. "규제가 아니다"라는 말이 반복될수록, 시장은 오히려 그 다음 수순을 예측하려 든다.
이번 해외투자 점검 국면은 환율의 방향보다, 당국의 언어가 어떻게 시장에서 규제에 준하는 신호로 해석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에 가깝다. 그리고 그 해석의 비용은, 이번에도 개인투자자에게 먼저 돌아가고 있다.
취재노트
환율 불안 속 시작된 증권사 해외투자 영업 점검
"규제 아니다"라던 당국 설명과 다른 시장 반응
이벤트 중단에 나선 증권사들, 사실상 일괄 '규제'
환율은 그대로, 비용 부담은 개인투자자에게
환율 불안 속 시작된 증권사 해외투자 영업 점검
"규제 아니다"라던 당국 설명과 다른 시장 반응
이벤트 중단에 나선 증권사들, 사실상 일괄 '규제'
환율은 그대로, 비용 부담은 개인투자자에게
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5년 12월 22일 16:17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