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로 주도권 쥔 외국계…기울어진 PEF 운동장 아예 뒤집은 금융당국
입력 25.12.30 07:00
금융당국 국내 PEF 규제 현실화 눈앞
각종 보고 신설에 투명성 강화 조치까지
운용 규제 역시 의원 입법 형태로 추진중
펀드레이징 걱정 없는 외국계 운용사
환율 효과에 '통 큰 투자' 늘어날 듯
  • 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넘보기 시작하자 외환당국이 비상등을 켰다. 일단 정부의 구두개입으로 인해 치솟던 환율은 잠시 안정세를 보이고 있으나, 강달러 장세는 당분간 지속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이같은 고환율 상황은 외국계 투자자들에게 한국 시장에 투자할 절호의 기회를 조성하고 있다. 달러화를 기반으로 글로벌 기관투자가들로부터 자금을 모은 외국계 사모펀드(PEF)는 더욱 공격적인 투자 활동을 이어갈 개연성이 높아졌다. 각종 규제에 직면한 국내 PEF 운용사들은 잔뜩 움츠려 들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11월 기준 우리나라의 실질실효환율은 83.4로 최근 6개월 간 매달 하락세를 기록하고 있다. 실질실효환율은 해당국가의 화폐가 상대국 화폐와 비교해 어느 정도의 구매력을 가졌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일정 시점으로 기준으로 100보다 높으면 고평가, 낮으면 저평가 된 것으로 간주한다. 11월 기준 미국의 실질실효환율은 117.1로 매달 높아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달러의 강세, 반대로 원화의 약세 상황이 계속되면 달러를 확보하고 있는 해외 투자자들은 환율 효과만으로도 충분한 투자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환율이 추후 3~4년 전 수준(1000~1100원)으로 회귀한다면 인수한 기업의 가치 변동이 없더라도 환율 효과만으로도 20% 이상의 수익률을 거둘 수 있다. 국내 운용사와 같은 M&A 딜에서 경쟁한다면 20% 이상 가격을 더 써내도 부담이 적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최근 글로벌 PEF 운용사 힐하우스와 흥국생명이 맞붙은 이지스자산운용 경영권 매각과정에선 힐하우스가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절차적 논란을 차치하고, 외화 펀드를 보유한 힐하우스가 흥국생명에 비해 자금 조달 측면의 부담은 훨씬 덜했을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최근 칼라일그룹은 KFC코리아 인수를 위한 본계약을 체결했다. 당초 KFC의 인수주체로 칼라일의 포트폴리오 기업인 투썸플레이스가 유력하게 거론되기도 했지만, 칼라일 아시아펀드의 계열사가 최종 인수자로 나섰다. 칼라일은 현재 한화 약 8조원 규모의 아시아파트너스6호 펀드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를 활용하면 펀드레이징에 대한 부담을 크게 덜뿐만 아니라 추후 환율 효과로 인한 투자수익 역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란 평가도 나온다.

    현재 경영권 매각이 진행중인 테일러메이드는 환율이 막판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매각측은 현재 유력한 원매자와 최종 협상을 진행중인데, 달러 거래인만큼 추후 같은 조건에 인수할 권리를 보유한 F&F는 치솟는 환율이 부담될 가능성이 높단 평가다.

    올해는 해외투자자들의 조 단위 국내 투자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외국계 투자자들의 인바운드 투자 증가세가 뚜렷하단 평가다. 프랑스 에어리퀴드는 DIG에어가스(약 4조8500억원), 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는 롯데렌탈(약 1조8000억원), KKR은 리뉴원·리뉴어스(약 1조8000억원), EQT파트너스는 더존비즈온 지분을 약 1조3000억원에 인수했다.

    원달러 환율에 매력을 느낀 외국계 투자자들은 수년 전부터 한국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할 채비를 마쳤다. 환율이 널뛰기 조짐을 보이던 1~2년 전부터 외국계 운용사들은 주요 투자처로 한국 부동산 시장을 꼽았다. 위기설이 돌았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시장 거래엔 이미 KKR, 아폴로, PAG 등 글로벌 최상위권 운용사들이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막대한 자본력과 환율을 무기로 외국계 운용사들이 한국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했지만, 이와 경쟁하는 국내 운용사들엔 마땅한 대응책이 없는 실정이다. 오히려 금융당국의 규제는 더욱 강화하기 시작했다. 운용의 투명성을 강조하기 위한 각종 장치가 마련될 것으로 전망되는데, 세부적인 법 개정은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물론 한국에 법인이 설립돼 있지 않은 외국계 운용사들은 한국 금융당국의 직접적인 규제 대상이 아니다. 

    PEF업계에서 한 가지 다행스럽게 여기는 요인은 레버리지 비율 규제를 제외하곤 운용에 대한 규제가 신설되진 않았단 점이다. 그러나 볼트온 금지와 공개매수 의무화 등 강력한 운용 규제 법안이 의원 입법 형태로 국회에 계류중이기 때문에 언제, 어떤 형태로 수면 위로 등장할 지 예단하기 어렵다.

    PEF업계 한 관계자는 "국내 운용사들이 외국계와 경쟁에서 앞설 요인을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며 "자본력을 갖추고 우호적인 환율효과까지 더해진다면, 앞으로 랜드마크 거래에서 외국계 운용사가 매우 공격적으로 베팅하는 모습이 많아질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장기간 엔화의 약세가 지속하고 있는 일본은 이미 외국계 운용사들의 텃밭으로 변모하고 있다. 올해 11월 기준 일본의 실질실효환율은 76.2로 조사가 이뤄진 국가들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중이다. 일본의 M&A 시장은 역대 초호황기를 맞고 있다. 역시 KKR, 베인캐피탈, 칼라일 등 글로벌 PEF가 초대형 딜을 거침없이 성사하며 이끌고 있단 평가다. 우리나라에선 일본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사례가 많지는 않으나 최근 MBK파트너스가 일본 대형 거래들을 성사하며 무게추를 조금씩 움직이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