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미투자 속도 조절은 '임시방편'…환율 부담은 그대로
입력 26.01.22 13:45
취재노트
대미 투자 본격화시 환율 추가 상승 압력 우려
외화 유동성 확보 위한 외평채 발행 준비 마쳐
정부는 메시지 관리에 방점…수급 영향 제한적
  • 고환율 부담이 이어지자 정부가 대미투자 집행 속도 조절에 나섰다. 다만 외환시장 안팎에서는 이번 조치가 환율 흐름 자체를 바꾸기보다는 단기적인 부담을 관리하기 위한 '임시방편'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온다. 달러 수급이라는 실물 요인보다는 환율이 과도하게 정치적, 심리적 이슈로 부각된 상황에서 정부가 시장 자극을 최소화하려는 신호 관리 차원의 대응이라는 해석이다.

    최근 환율을 둘러싼 정부의 메시지는 한층 강해졌다. 21일 서울외환시장에서 원·달러환율은 1480.4원에 거래를 시작했다. 장중 환율이 1480원을 넘은 것은 지난해 12월 24일 이후 17거래일 만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신년 기자회견에서 "책임당국에 의하면 한두 달 정도 지나면 (원·달러환율이) 1400원 전후로 떨어질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고 발언했고, 이후 원·달러환율은 하락세로 전환해 1470원대 초반에서 거래되고 있다.

    치솟는 환율에 국회에서 논의 중인 대미투자특별법 처리가 지연될 가능성도 높아졌다. 법안 처리 일정에 따라 대미 투자 집행 시점이 늦춰지는 구조다. 여기에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한국의 3500억달러 대미 투자는 올해 상반기 중 본격 집행되기 어렵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하면서, 시장에서는 이를 사실상의 속도 조절 선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정부의 설명대로라면 명분은 충분하다. 연간 200억달러 한도의 대미 투자 계획이 본격화될 경우 환율에 추가적인 상승 압력을 줄 수 있다는 시장의 우려 때문이다. 특히 환율이 1480원대 중후반에서 민감하게 움직이는 국면에서는 정책 하나하나가 시장 심리에 미치는 영향이 과도하게 확대될 수 있다. 정부로서는 '괜한 오해'를 만들지 않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하지만 시장의 시선은 다소 다르다. 대미 투자 자금이 실제로 외환시장을 거쳐 달러 수요를 자극하는 구조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애초 정부가 설명해 온 대미 투자 재원은 외환보유액을 직접 소진하거나 원화를 외환시장에서 달러로 환전해 조달하는 방식이 아니다. 해외 자산에서 발생하는 이자소득이나 기존에 보유 중인 외화 자산을 활용하는 구조로 설계돼 있어 실물 기준으로 보면 외환시장 수급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설명이다.

    시장 관계자는 "기존 계획대로라면 대미 투자 자금은 외환시장을 통과하지 않는 구조라 환율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진 않는다"며 "환율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가 되면서 정부가 시장을 자극할 수 있는 행동이나 표현을 최대한 자제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2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와 관련한 한미 협상 문구에는 외환시장에 불안을 줄 정도의 상황이 발생할 경우 투자 액수를 조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정부 입장에서는 이 조항을 근거로 '속도 조절 가능성'을 열어두는 메시지를 내며 시장 반응을 살피는 전략을 택한 셈이다.

    정부가 대미 투자 속도 조절을 언급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외화 유동성 확보를 위한 준비를 병행하고 있다. 정부는 최근 20억~30억달러 규모의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 발행을 위한 주관사 선정을 마쳤다. 외환시장 변동성 확대 가능성과 대미 투자 집행에 대비해 달러 유동성을 사전에 확보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정부의 외평채 발행 한도는 지난해 14억달러에서 올해 50억달러 수준으로 3배 넘게 증가했다.

    한 외환시장 관계자는 "실제로 돈을 안 쓰겠다는 신호라기보다는 환율이 민감한 상황에서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려는 정치적·심리적 관리에 가깝다"며 "시장은 불확실성을 두려워하지 예정된 투자건을 두려워하진 않는다"고 답했다.

    환율을 둘러싼 부담이 커질수록 정책 메시지는 더욱 정치화되고, 시장은 그 신호에 과잉 반응하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 대미 투자 속도 조절론 역시 환율 급등 국면에서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카드 중 하나다. 다만 시장에서는 이를 환율 안정의 근본 해법으로 보지는 않는다. 달러 수급의 방향성을 좌우하는 것은 단기 이벤트나 발언이 아니라, 외국인 자본이 유입될 수 있는 여건과 국내 투자 환경의 구조적 개선이라는 점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