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찍히려면 '생산적 금융' 해야하는데"…금융사들, 케이스 찾기에 혈안
입력 26.02.11 07:00
생산적 금융, 금융지주 내부 KPI로 반영돼
실무진들 투자처 두고 연일 내부 회의중
석화 구조조정·인프라 등 대형 딜 '집중'
"중소·중견 기업은 여전히 우선순위 밖"
  • "정부에 찍히지 않으려면 생산적 금융을 하긴 해야 한다."

    요즘 금융권에서 가장 자주 들리는 말이다. 생산적 금융이 정책 기조로 명확해진 이후 금융사들은 앞다퉈 목표치를 내걸었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새로운 먹거리에 대한 기대보다는, 피할 수 없는 과제를 떠안았다는 인식이 더 강하다.

    문제는 방향이 아니라 수단이다. 생산적 금융을 '얼마나 했느냐'보다 '무엇으로 했느냐'가 중요해지면서, 금융사들 사이에서는 당국에 설명 가능한 사례를 확보하는 것이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내부 보고서에 올릴 수 있고, 금융당국의 질문에도 대응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필요해진 셈이다.

    이 같은 변화는 숫자가 붙으면서 더 분명해졌다. 주요 금융지주들은 적게는 수십조원에서 많게는 100조원이 넘는 생산적 금융 목표를 설정해 둔 상태다. 생산적 금융이 선언적 구호를 넘어 실제 경영 과제로 자리 잡으면서, 본점 차원의 전략 회의도 잦아졌다. 투자와 여신, 계열사별 역할을 나눠 실적을 어떻게 채울지를 논의하는 구조다.

    특히 생산적 금융이 내부 성과 지표(KPI)에 반영되기 시작한 점이 현장 분위기를 바꿨다. 단순 참여 여부가 아니라 실제 집행 실적이 조직 평가와 임원 성과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금융사 내부에서는 개별 안건 하나하나를 두고 "이게 생산적 금융으로 인정되느냐"를 따지는 분위기가 일상화됐다. 구조조정 투자나 인프라 사업처럼 경계에 걸린 사안일수록 내부 검토는 길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금융권의 시선은 석유화학 구조조정으로 향하고 있다. 생산적 금융이라는 이름으로 설명이 가능하고, 정책적 명분과 일정 규모를 동시에 갖춘 사례로 거론되기 때문이다. 개별 금융사가 단독으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고, 여러 금융사가 공동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점도 부담을 낮춘다는 평가다.

    현재 정부가 주도하는 석유화학 구조조정은 이미 실무 단계에 접어들었다. 산업단지별 실사가 진행 중이며, 실사가 마무리되면 금융지원 방안이 정리돼 정부 보고와 채권자 설명회를 거쳐 안건 결의로 이어질 전망이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이번에는 태영건설 사례처럼 중간에 빠지겠다는 채권단이 나오기 어려운 구조"라며 "정부 쪽 압박도 상당하고, 채권단 내부에서도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사실상 주채권단인 은행 입장에서는 선택지가 많지 않은 상황이라는 의미다.

    이 때문에 금융권에서는 석유화학 구조조정 지원안을 생산적 금융 실적으로 묶을 수 있을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사안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석유화학 지원은 정책적으로 피하기 어려운 사안"이라며 "최종 판단은 금융당국 몫이지만, 내부적으로는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KPI 반영과 함께 실적 집계 방식에 대한 내부 경계도 강화되고 있다. 일부 금융지주에서는 기존 기업대출이나 투자 활동을 이름만 바꿔 중복 산정(더블 카운팅)하는 방식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지침이 공유된 것으로 전해진다. 형식적인 실적 확대는 사실상 어려워졌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한 금융지주 관계자는 "100조원 가운데 상당 부분은 경상적인 기업금융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겠지만, 문제는 그 이후"라며 "남는 물량을 무엇으로 채울지가 핵심"이라고 말했다. 결국 눈에 띄는 프로젝트나 구조조정 사례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 과정에서 금융사들의 시선은 이미 검증된 레퍼런스로 빠르게 쏠리고 있다. 신안우이 해상풍력처럼 정책적 명분과 규모를 동시에 갖춘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내부 설명이 수월하고, 한 번에 실적을 채울 수 있다는 점에서 메가 프로젝트 선호 현상도 뚜렷해지고 있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중소·중견 기업으로의 자금 확산이 충분한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결국 큰 사업 위주로만 자금이 몰리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서다. 

    은행과 증권사 사이의 온도 차도 뚜렷하다. 은행들은 여신과 정책금융을 통해 비교적 안정적으로 생산적 금융 실적을 쌓을 여지가 있는 반면, 증권사들은 수익성과 규제 부담 사이에서 방향을 잡기 어렵다는 불만이 적지 않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생산적 금융이 기업금융 위주라면 수익성이 낮을 수밖에 없다"며 "수익이 나지 않으면 다른 영역에서 이를 보전해야 하고, 그 부담이 다시 부동산 PF나 실물 투자 쪽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금융지주들은 당국 기조에 맞춰 증권사의 부동산 PF 비중을 줄이려는 분위기지만, 증권사들의 사업 구조는 단순하지 않다. 실물 부동산 투자에서 수익을 내려면 대출보다 에쿼티(지분) 중심 투자가 불가피한 경우가 많고, 이 경우 위험가중자산(RWA) 부담이 커져 자기자본 소요와 규제 부담이 동시에 늘어난다.

    여기에 최근 금리 환경까지 겹치면서 증권사들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가 더욱 제한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금융권에서는 이런 제약들이 결국 정책적으로 안전하고 명분이 있는 대형 프로젝트로 자금을 쏠리게 만든다고 본다.

    한 정책금융 관계자는 "지금은 생산적 금융이라는 시스템을 새로 만드는 단계라기보다, 그 시스템을 입증할 사례를 쌓는 과정"이라며 "당국의 유권해석 하나가 금융권 자금 흐름을 크게 바꿀 수 있는 시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