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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는 원래 인수합병(M&A)으로 성장한 그룹이 아니다. 계열사 안에서 기술을 개발하고 사업을 키운 뒤, 필요한 경우 기존 사업과 맞닿은 회사를 붙이는 볼트온(Bolt-on) 전략을 주로 활용해왔다. 다른 대기업이 대형 거래를 통해 단기간에 새로운 시장으로 진입할 때도 LG는 자체 연구개발(R&D)과 내부 육성을 앞세웠다.
이 방식은 지난 수십 년간 유효했다. 무리한 대형 거래가 적었던 만큼 실패에 따른 충격도 제한적이었고, 계열사별로 축적한 기술과 생산 역량을 묶어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다. 투자은행(IB)업계에서도 LG의 보수적인 투자 기조를 약점이라고만 보지는 않았다. 앞서서 여러 산업에 뛰어들었다가 대규모 손실을 입는 것보다, 검증된 사업을 직접 키워 안정적으로 확장하는 방식이 LG에는 잘 맞았다는 평가다.
인공지능(AI) 시대에도 같은 성장 공식이 통할지는 별개의 문제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 엔비디아 본사를 찾아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와 다시 만난 것도 이 질문을 부각시키는 계기가 됐다. 지난 6월 서울 LG트윈타워 회동 이후 약 두 달 만이다. 양측은 AI 데이터센터(AIDC)와 피지컬 AI, 로보틱스 등 차세대 산업의 협력 방안을 구체적으로 논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LG가 AI를 그룹의 미래 성장축으로 삼겠다는 방향은 이미 분명하다. 구 회장은 올해 AI·바이오·클린테크를 의미하는 'ABC'를 미래 사업 키워드로 제시했다. 2028년까지 국내에 약 100조원을 투자하고 이 가운데 절반가량을 AI와 배터리, 전장, 차세대 디스플레이 등 성장 분야에 투입한다는 계획도 밝혔다.
그룹 내부의 AI 밸류체인도 이미 상당 부분 구축됐다. LG AI연구원이 자체 AI 모델인 엑사원(EXAONE)을 개발하고, LG전자는 로봇 하드웨어와 냉난방공조(HVAC), LG이노텍은 비전센싱과 정밀 부품, LG CNS는 AI팩토리와 디지털트윈·로봇 학습 플랫폼을 담당하는 구조다. LG에너지솔루션의 배터리와 에너지저장장치(BESS)까지 더하면 로봇의 두뇌부터 눈과 손발, 전원, 학습·제어 플랫폼을 그룹 안에서 연결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증권가에서는 LG가 AI 모델 설계와 센싱, 하드웨어 제조, 학습·제어 플랫폼을 한데 묶을 수 있는 수직계열화 구조를 갖춘 것으로 보고 있다. LG전자는 액추에이터 등 핵심 부품과 로봇 완제품을, LG AI연구원은 로봇 기반 모델을, LG이노텍은 정밀 비전센싱을, LG CNS는 로봇 학습·통합운영 플랫폼을 각각 맡고 있다.
이제 시장이 주목하는 것은 실행 방식이다. 투자업계에 따르면 LG화학은 AI·반도체 밸류체인에 진입하기 위한 첨단소재 M&A를 꾸준히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AI 서버와 고성능 반도체에 쓰이는 CCL(동박적층판), 반도체 패키징 소재, 고기능 절연소재 등이 후보로 거론된다. 기존 석유화학과 배터리 소재 중심의 사업구조에서 벗어나 AI 전방산업의 성장 수혜를 직접 받을 수 있는 스페셜티 소재를 확보하려는 취지다.
LG전자는 HVAC 사업에서 후속 볼트온 거래를 살펴보고 있다. 노르웨이 온수 솔루션 업체 OSO 인수 이후 유럽 히트펌프뿐 아니라 데이터센터 냉각과 산업용 공조까지 검토 범위를 넓힌 것으로 전해진다. 이를 위해 지난해 말 조직개편에서 본부 내 M&A 기능도 별도로 마련했다.
로보틱스 역시 꾸준히 거론되는 분야다. LG전자는 상업용 로봇과 가정용 로봇을 동시에 키우고 있고, LG CNS는 제조 현장에 로봇과 디지털트윈을 결합하는 피지컬 AI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LG이노텍은 휴머노이드와 자율주행에 들어가는 카메라·센싱 부품으로 사업을 넓힐 수 있다.
검토하는 사업은 적지 않다. 문제는 실천이다. LG그룹의 마지막 조 단위 해외 M&A로는 2018년 오스트리아 자동차 조명업체 ZKW를 약 11억유로, 당시 환율 기준 약 1조4000억원에 인수한 거래다. 이후에도 여러 지분투자와 볼트온 인수는 이어졌지만, 그룹의 사업구조를 단번에 바꿀 만한 대형 거래는 손에 꼽힌다.
IB업계에서는 최근 1~2년 동안 AI 인프라와 반도체 소재, 로보틱스, 데이터센터 냉각, 산업용 공조 등 다양한 해외 매물이 LG 측에 제안됐다고 입을 모은다. 로보틱스 기업을 포함해 수천억원에서 조 단위에 이르는 후보들을 검토했지만 상당수는 내부 논의 단계에서 멈춘 것으로 전해진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후보군 검토는 꾸준히 이뤄지지만 실제 거래 단계로 넘어가기 직전 지주 차원의 의사결정이 길어지는 경우가 많다"며 "가격 자체보다 그룹 내 투자 우선순위와 향후 성과에 대한 책임 소재를 두고 마지막 결론이 쉽게 나지 않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LG가 재원이 없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은 아니다. 시장에서는 LG화학이 보유한 LG에너지솔루션 지분을 단계적으로 활용하면 약 10조원 안팎의 현금 유입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보유 지분 전체의 시장가치는 수십조원에 달한다. LG전자 역시 본업에서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창출하고 있어 미래 사업을 위한 투자 여력은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돈도 있고, 매물도 들어오며, 사업 방향도 정해졌다. 그럼에도 거래가 나오지 않는 배경으로 투자업계는 가격보다 '책임'을 꼽는다.
AI와 로보틱스 관련 기업들의 몸값은 이미 수천억원에서 조 단위로 올랐다. 반도체 소재 기업은 글로벌 전략적투자자(SI)와 사모펀드(PEF)가 동시에 경쟁하고 있고, 로보틱스 역시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선도 기업의 밸류에이션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 냉각이나 산업용 공조처럼 당장 시장성이 확인되는 분야도 성장 기대가 가격에 상당 부분 반영된 상태다.
대기업은 PEF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업을 인수할 수 있다. 대신 진입가격이 지나치게 높으면 수년 뒤에도 인수 당시 기업가치를 정당화할 만한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 AI처럼 아직 기술 표준과 최종 승자가 정해지지 않은 산업에서 조 단위 거래를 결정할 경우, 해당 사업을 선택한 경영진에게 책임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LG엔솔 지분 매각으로 대규모 현금을 쥐게 될 LG화학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말 신학철 부회장에 이어 김동춘 대표 체제로 전환한 LG화학은 석유화학 구조조정과 첨단소재 육성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김 대표는 IT·전자재료와 첨단소재 사업을 이끈 인물인 만큼 AI·반도체 소재 중심으로 포트폴리오 전환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조 단위 로보틱스 기업이나 반도체 소재 회사를 인수하더라도 LG화학이 단기간에 가져갈 수 있는 매출과 이익은 제한적일 수 있다. 인수가격은 이미 미래 성장성을 상당 부분 반영한 반면, LG화학이 인수 직후 얻을 수 있는 시너지는 크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거래가 실패할 경우에는 투자 판단에 대한 책임이 고스란히 새 경영진에 돌아온다.
LG그룹 특유의 의사결정 방식도 영향을 미친다는 평가다. LG는 계열사 자율경영과 합의형 의사결정을 중시한다. 특정 오너가 대규모 거래를 밀어붙이고, 그에 동의한 경영진에게 과감하게 권한을 주는 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충분한 사업성 검토와 내부 조율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대형 투자의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릴 수밖에 없었다.
구 회장은 취임 이후 꾸준히 외부 인재 영입과 순혈주의 탈피, 지분투자와 M&A 검토를 주문해왔다. 다만 그룹 전체가 아직 대형 M&A를 반복적으로 수행할 만큼 경험과 의사결정 구조를 축적한 것은 아니라는 평가가 나온다. 2018년 ZKW 이후 조 단위 거래 경험이 드문 상황에서 AI와 로보틱스처럼 불확실성이 큰 사업에 대규모 자본을 투입하기는 쉽지 않다.
한 IB업계 관계자는 "구 회장이 외부 기술 확보를 강조한 것은 맞지만, 최태원 SK그룹 회장처럼 불확실성을 감수하고 일단 대형 베팅을 하는 스타일은 아니다"라며 "LG의 의사결정 구조에서는 특정 계열사가 원하는 매물이 있어도 그룹 전체의 우선순위와 시너지가 충분히 설명돼야 최종 결론이 날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 같은 신중함이 반드시 문제인 것은 아니다. LG는 대형 거래가 적었던 대신 내부에서 키운 사업을 바탕으로 배터리와 전장, 디스플레이, 가전 등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구축했다. 남들이 앞다퉈 신사업에 뛰어들 때 무리하게 뒤따르지 않은 것이 결과적으로 재무 안정성과 사업 지속성을 높인 경우도 있었다.
문제는 AI 시장은 LG가 기존에 경험한 제조업과 속도가 다르다는 점이. 석유화학이나 배터리처럼 대규모 공장을 짓고 생산성을 높여 추격할 수 있는 산업과 달리, AI는 모델과 데이터, GPU, 플랫폼, 개발인력과 고객 생태계가 빠르게 결합한다. 선도 기업을 먼저 확보한 회사가 기술 표준과 고객을 함께 가져갈 가능성도 크다.
삼성은 레인보우로보틱스를 통해 로봇 기술 확보에 나섰고, 현대차그룹은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중심으로 로보틱스 생태계를 확장하고 있다. SK그룹도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에너지 인프라를 묶은 AI 밸류체인에 대규모 자본을 투입하고 있다. 경쟁 그룹들이 M&A와 지분투자를 통해 '시간을 버는' 동안 LG는 기존처럼 내부 육성만으로 충분한 속도를 낼 수 있는지를 입증해야 한다.
이번 엔비디아 답방도 결국 같은 질문을 남긴다. LG의 AI 방향은 분명하다. 숫자도 제시했다. 계열사별 역할과 엔비디아와의 협력 구상도 구체화되고 있다.
결국 이제 시장이 궁금해하는 것은 LG가 AI를 하느냐가 아니다. 지난 수십 년간 성공한 '직접 키우는 성장 방식'만으로 AI 시대에도 경쟁사보다 빠르게 기술과 시장을 확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LG가 기존 공식을 유지할지, 아니면 기술과 시간을 사기 위해 대형 M&A라는 새로운 카드를 꺼낼지는 향후 LG화학의 첨단소재 투자와 LG전자의 후속 거래에서 처음 확인될 전망이다.
입력 2026.08.13 07:00
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6년 08월 10일 07:00 게재
취재노트
엔비디아와 차세대 AI 협력은 빨라지는데
AI·로보틱스 매물 검토만 활발한 상황
가격보다 투자 책임·우선순위 조율이 걸림돌
내부 육성 강점 분명해도 AI 시대는 속도 경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