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이 보여준 '미국 상장'의 진짜 힘
입력 2026.09.07 07:00

취재노트

쿠팡 규제 갈등, 美 의회·통상 이슈로 확산

정부·여당은 국내 기업 미국行에 민감한 기류

토스·두나무 등 해외 상장 검토 기업 몸사려

기업들엔 밸류 넘어 美 이해관계자라는 변수

  • (그래픽=윤수민 기자)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사고에 대해 한국 정부가 회사에 부과한 과징금은 6250억원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이달 쿠팡 본사에 조사관 30여명을 보냈다. 요구한 자료는 2016년부터 약 10년치로 전해진다. 통상적인 조사보다 투입 인력이 많고 자료 요구 기간도 이례적으로 길다는 평가가 나온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공정위 조사관들은 쿠팡 본사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갔다. 사전 통지 없는 현장조사가 적법하지 않다며 쿠팡이 조사를 거부해서다. 주병기 공정위원장은 국회에서 쿠팡을 고발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쿠팡은 법원에 현장조사를 막아달라는 소송을 냈다. 한 회사와 정부가 정면으로 부딪힌 것이다.

    여기까지였다면 국내에서 익숙하게 봐온 기업과 규제당국의 충돌로 끝났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번엔 무대가 미국까지 넓어졌다.

    미국 공화당 소속 버니 모레노 상원의원은 지난달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에게 한국 정부에 대한 공식 조사를 요구했다. 무역법 301조에 따른 '추가 관세'까지 카드로 꺼냈다. 미 하원 법사위원회는 앞서 35페이지짜리 보고서를 내고 한국 정부가 쿠팡을 비롯한 미국 기업을 차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CNBC 등 외신들은 백악관을 인용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한미 통상 문제가 불거질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쿠팡 주요 주주였던 그리녹스와 알티미터도 움직였다. 한국 정부 조치로 투자 손실을 입었다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근거한 국제투자분쟁(ISDS) 절차에 착수했고, USTR에는 무역법 301조 조사도 요구했다. 개인정보 유출 사고로 시작된 문제가 공정위 조사와 행정소송을 넘어 미국 투자자와 정치권이 개입하는 한미 통상 현안으로 번진 셈이다.

    국내 기업들이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최근 기업들의 속내는 미묘해졌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정부와 맞서는 쿠팡을 보면서 "속이 시원하고 부럽기도 했다"고 말했다.

    국내 대기업이 정부와 정치권의 압박을 받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다. 공정위 조사를 받고 국정감사에 불려가고 새로운 규제가 만들어지면 대관조직이 세종시와 여의도를 뛴다. 유통업계는 의무휴업과 납품업체 문제, 플랫폼 규제 등을 놓고 수년간 정부와 정치권을 상대해왔다. 조사를 받으면 해명하고, 법안이 나오면 설득하고, 국감에 부르면 나가는 것이 익숙한 대응이었다.

    쿠팡이라고 국내 규제에서 벗어날 이유는 없다. 사업과 소비자의 대부분이 한국에 있고 개인정보 유출 피해자도 한국 소비자다. 한국 정부가 한국 법에 따라 쿠팡을 조사하는 것 자체는 이상할 게 없다. 

    다른 점은 쿠팡Inc.가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돼 있다는 것이다. 쿠팡에는 세종과 여의도말고도 워싱턴이라는 새로운 무대가 하나 더 있다.

    쿠팡Inc.가 올해 1분기 미국 연방정부를 상대로 신고한 로비 지출은 109만달러다. 대상에는 미 의회와 백악관, 상무부, USTR 등이 포함돼 있다. 디지털 통상과 전자상거래 등 회사의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에 꾸준히 목소리를 내왔다. 109만달러의 로비가 최근 미 정치권의 움직임을 만들어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쿠팡이 워싱턴에 이해관계를 전달할 통로를 구축해왔다는 점은 분명하다.

    여기에 미국 투자자라는 이해관계자도 있다. 한국 정부의 제재가 쿠팡의 손익과 기업가치에 영향을 주면 미국 주주의 투자수익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녹스와 알티미터가 직접 분쟁 절차에 나서고 미 의회가 한국 정부의 조치를 문제 삼으면서 쿠팡을 둘러싼 규제의 파장은 한국 안에서만 끝나지 않게 됐다. 미국 상장을 검토하는 국내 기업들이 쿠팡을 유심히 보는 이유다. 

    그동안 국내 기업들이 미국 증시를 찾는 이유는 비교적 명확했다. 더 높은 기업가치와 큰 자금조달 시장, 풍부한 유동성이었다. 토스 운영사 비바리퍼블리카가 나스닥 주식예탁증서(ADR) 상장을 검토하면서 시장에서 거론된 기업가치는 10조~20조원이었다. 미국에 ADR을 먼저 상장한 뒤 국내 IPO를 추진하는 방안까지 검토했다. 미국 핀테크 기업의 밸류에이션을 먼저 적용받겠다는 계산이었다.

    두나무도 네이버파이낸셜과 포괄적 주식교환 이후 IPO를 추진할 계획이다. 미국 회계기준(US GAAP)을 검토해왔고 시장에서는 미국 증시가 주요 선택지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 카카오모빌리티와 야놀자 등도 투자자의 회수 문제와 맞물려 미국 증시를 선택지로 고민하고 있다. 

    최근 달라진 것은 이런 검토 사실을 밖으로 드러내는 방식이다. 투자은행(IB)업계에서는 미국 상장을 검토하면서도 공식적인 언급은 피하려는 기업들이 많아졌다는 얘기가 나온다. 대관 담당자가 먼저 말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돈을 벌어 미국 증시로 간다'는 프레임이 붙는 순간 상장의 경제적 득실과는 별개의 문제가 시작될 수 있어서다. 

    한 대기업 대관 관계자는 "미국 상장을 실제로 검토하더라도 공식화해서 좋을 게 없다"고 말했다. 쿠팡이 미국 정부와 정치권을 움직이는 방식 때문에 국내 정치권에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얘기까지 나온다고 했다. 

    정부의 방향도 뚜렷하다. 금융당국은 올해 상반기 모자회사 중복상장을 원칙금지·예외허용하는 방향으로 규제를 강화했다. 해외 거래소에 자회사를 상장하는 경우에도 모회사 이사회가 기존 주주에게 미칠 영향을 평가하고 주주보호 방안을 마련하도록 했다. 국내에서 성장한 기업들이 해외 증시를 택할 경우 자본시장 공동화 논란이 불거질 수 있고, 상장 모회사의 핵심 자회사가 다시 해외 증시에 올라가면 기존 주주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이 무렵 토스의 미국행도 멈췄다. 회사는 적정 기업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시간을 두고 시장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입장이지만 금융권에서는 국내 대형 유니콘의 해외 선상장을 바라보는 정부의 부정적인 기류도 부담으로 작용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쿠팡 사태는 정부가 미국 상장을 불편하게 바라볼 이유를 하나 더 만들었다. 미국 증시에 올라간 국내 기업이 늘어날수록 한국 정부의 규제가 미국 투자자의 이해관계와 충돌할 여지도 커진다. 국내 기업에 대한 규제가 외교와 통상의 영역으로 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쿠팡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기업들의 계산은 정반대가 된다. 정부 입장에선 부담이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미국 상장의 또 다른 효용으로 읽힐 수 있다. 쿠팡이 미국 증시에서 얻은 것은 높은 기업가치와 대규모 자금조달 기회만이 아니었다. 미국에 이해관계자를 만들었다.

    이를 미국 상장이 한국 정부의 규제를 막아주는 '방패'로 단정하는 것은 아직 무리일 것이다. 한국 소비자의 개인정보 유출을 조사하고 국내에서 벌어진 공정거래법 위반 여부를 살피는 것은 한국 정부의 규제 권한이다. 미국 투자자가 손실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정당한 국내 규제까지 무역장벽으로 간주한다면 정부로서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기업 입장에서도 미국 증시에 상장하면 미국의 공시와 투자자 보호 규제를 따라야 하고 주주 소송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플랫폼과 금융기업이라면 쿠팡을 바라보는 셈법이 이전과 같기는 어렵다. 사업과 고객은 한국에 두고 국내 규제를 받으면서 주주는 미국에 둘 수 있기 때문이다. 가상자산이나 핀테크처럼 정책 변화 하나가 사업모델과 기업가치를 크게 흔드는 업종이라면 더욱 그렇다.

    정부가 걱정하는 지점과 기업이 매력을 느끼는 지점이 묘하게 겹치는 모양새다. 국내 기업들이 미국 증시를 바라보는 공식은 그동안 단순했다. 더 높은 밸류에이션, 더 많은 자금, 더 넓은 투자자층이었다. 쿠팡은 여기에 재무제표에는 잡히지 않는 항목 하나를 더 보여줬다. 미국에서 주식을 판다는 것은 미국의 돈만 받는 일이 아니었다. 미국에 이해관계자를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정부와 정치권의 시선을 의식해 미국 상장 계획을 입 밖에 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진 시기에, 역설적으로 쿠팡은 한국 기업들에 미국 상장의 또 다른 힘을 보여주고 있다. 쿠팡 사태는 한국 기업들의 미국행을 막는 사건이 될 수도 있다. 반대로 기업들이 왜 미국으로 가고 싶어 하는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사건으로 남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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