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고용과 밀접해 구조조정 쉽지 않아
유상증자 등 모기업 추가 출자 불가피해
정부 외면 속 '슬로우 데스' 답 찾을까
-
국내 석유화학산업 부진 속 여천NCC도 생존의 갈림길에 섰다. 차입금 의존도 상승과 부채비율 급증으로 채무불이행(EOD) 요건에 위험 수준으로 접근하고 있다. 여수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면 급진적 구조조정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 당분간은 모회사인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의 지원으로 연명할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다.
최근 정부는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석유화학산업의 구조적 위기를 처음으로 공식화했다. 2028년까지 글로벌 공급과잉이 한국 시장 5배에 달하는 6100만톤까지 확대될 것이란 전망이다. 그중에서도 나프타분해설비(NCC)의 경우 기술적 특성상 70% 이상의 가동률이 불가피한 것으로 집계됐다. 공급과잉 상황에서도 생산을 줄일 수 없는 구조적 한계를 지닌 셈이다.
이러한 상황은 NCC 업체들의 실적 추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국내 NCC 9개사의 실적은 2021년 영업익 7조6000억원에서 2022년 영업손실 2715억원, 2023년 영업손실 1633억원으로 급전직하했다. 올해 3분기엔 8494억원까지 적자폭이 확대됐다.
여천NCC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여천NCC는 올해 10월 시도한 1000억원 규모의 회사채 발행에서 고작 40억원의 주문만이 들어왔다. 신용평가사들은 6개월 내 재무 상황을 개선하지 않으면 신용등급이 떨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현재 신용도(A-)에서 한 등급만 떨어져도 여천NCC는 EOD에 직면할 수 있다.
여천NCC가 발행한 공모 회사채 7050억원 중 총 1300억원에는 신용등급 관련 트리거가 걸려 있다. 이중 700억원 규모는 신용등급이 BBB+ 이하로 강등될 경우, 600억원은 BBB 이하에 도달할 경우 각각 조기에 원금을 강제상환해야 한다. 이번 공모사채에는 교차 부도(크로스 디폴트) 조항이 포함돼, 다른 채권에도 연쇄적으로 EOD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위기는 호황기의 과도한 배당이 주 원인으로 지적된다. 여천NCC는 지난 12년간 벌어들인 이익의 대부분인 2조700억원을 모회사에 배당으로 지급했다. 연도별로 보면 2017년 4000억원, 2018년 8600억원, 2019년 1400억원, 2020년 3300억원, 2021년 3400억원 등이다.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은 각각 1조350억원씩의 배당금을 수령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미래 투자재원이 고갈됐다는 점이다. 지난 2018년부터 3년간 진행된 NCC 2공장 증설(9162억원)과 부타디엔 설비 투자(1400억원) 등 총 1조562억원의 설비투자 자금 상당 부분이 차입으로 조달됐다. 차입금의존도는 2020년 39.9%에서 2024년 9월 말 57.2%까지 치솟았다. 같은 기간 부채비율도 113.4%에서 321.0%로 급등했다.
최근에는 EBITDA(상각전영업이익)가 이자비용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다. 실제로 2024년 3분기 기준 EBITDA/이자비용 비율은 0.9배에 그쳤다.
신용평가사 고위 관계자는 "신평사들이 그간 계속 모회사인 한화와 DL그룹에 수차례 경고해왔지만, 양사가 대부분의 투자를 차입으로만 진행하면서 재무 상황이 계속 악화됐다"며 "결과를 놓고 봤을 때 배당을 위해 차입까지 진행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라고 지적했다.
석화업계가 장기 침체에 빠지자 여천NCC가 자생력을 잃어버리면서,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당장의 유동성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상증자 등 대규모 지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구조적 공급과잉 상황에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급진적인 구조조정도 쉽지 않다. 여천NCC는 여수국가산업단지의 주요 기업으로, 대규모 고용은 물론 협력업체들의 생태계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더구나 한화그룹은 대우조선해양 인수로 거제 등 지역사회와 고용 문제에 대한 부담이 커진 상황이다. 지역 정치인들의 반발과 지역 경제에 미칠 충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의 이번 석화업계 구조조정 대책은 일정 부분 돌파구가 될 수도 있다. 2025년 상반기 중 검토될 산업위기 선제대응지역 지정의 경우, 여수가 주요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협력업체 고용유지지원금 기준 완화, 기존 대출 만기연장, 원금상환 유예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다만 이는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현 정부가 인위적 구조조정에 대해 줄곧 선을 긋고 있고, M&A를 통한 공격적인 구조개편을 유도하는 '공정거래법상 독과점 규제 유예조치'에 대한 내용도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제 공은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로 넘어갔다. 양사는 현재 회사채 EOD를 피하기 위해 유상증자를 중심으로 한 지원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현재의 시장 상황과 정치적 환경을 고려할 때, 급격한 변화보다는 순차적인 구조조정, 이른바 '슬로우 데스'가 유력한 시나리오로 점쳐진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결국 구조적인 공급과잉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근본적인 경쟁력 회복이 어렵기 때문에, 정부 정책은 급격한 구조조정을 피하면서 연착륙을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봐야 한다"며 "한화와 DL도 '이번만 넘기자'는 식의 단기적 대응에만 집중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