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게임 반도체 M&A 나설까 시장 관심 집중
삼성 IB에 매물 리스트 요구하며 적극 행보
IB들 기회 잡으려 분주…현실적 벽은 높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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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가 오랜만에 M&A 시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오디오와 공조 등 성장성 있는 분야에서 성과를 냈는데, 가장 핵심인 반도체(칩) 분야에서도 M&A 숙원을 풀 수 있을지 관심이 모인다.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은 삼성전자의 행보에 반색하면서 대형 거래 기회를 잡기 위해 분주한 모습이다.
삼성전자의 자회사 하만(HARMAN)은 이달 초 미국 헬스케어 기업 마시모(Masimo)로부터 오디오 사업부 사운드유나이티드(Sound United)를 인수하기로 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삼성전자는 하만이 바워스앤윌킨스(B&W), 데논(Denon) 등 브랜드 라인업을 강화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거래 규모는 3억5000만달러(약 5000억원)다. 하만(80억달러) 인수 이후 최대 규모 M&A라지만 삼성전자의 체급을 감안하면 큰 성과라 보긴 어렵다. 그나마 하만이 독립적인 의사 결정 체제를 갖추고 있고, 거래 규모가 아주 크지 않아 삼성전자 재무라인의 비토(veto)를 피할 수 있었단 평가가 따랐다.
삼성전자가 지난 수년간 숱한 M&A 기회를 물색했다. 경영진도 공식 석상에서 여러 차례 M&A 계획을 밝혔지만 성과가 없었다. 하만의 중형급 M&A로 최소한의 존재감만 보인 후 다시 폐관 상태에 접어들 것이란 냉소가 없지 않았다.
불과 며칠 뒤 삼성전자가 유럽 최대 냉난방공조(HVAC) 기업 플랙트그룹(FläktGroup)을 인수하며 분위기가 달라졌다. 인수가는 15억유로(약 2조3000억원)로 하만 이후 첫 조단위 거래다. 삼성전자가 이제는 제대로 M&A를 해보려 한다는 인식이 시장에 퍼지기 시작했다.
두 건의 M&A가 경영진이 공언해 온 '의미 있는 M&A'인지는 따져봐야 한다. 그러나 하만의 실적을 견인하는 오디오, 성장성이 큰 데이터센터 공조 부문에 힘을 실은 것 자체는 긍정적이란 시각이 있다. 고(故) 한종희 부회장 시절부터 이뤄진 물밑 작업이 이제야 성과로 나타난다는 평가도 나온다.
삼성전자의 M&A는 앞으로도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올해 M&A를 중점 과제로 꼽고 각 사업부를 독려하고 있다. 전보다 적극적으로 IB들에 매물 리스트를 올려달라 요구하는 분위기다. 하만 역시 전장 업체 인수를 고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체로 1조원 안팎의 매물들인 것으로 거론된다.
한 IB 관계자는 "삼성전자에서 해외의 로보틱스, HVAC 등 분야의 매물을 살피고 있다"며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처리 문제로 조심스러웠던 바이오·헬스케어 분야에서도 굵직한 거래가 있으면 나서겠다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시장의 관심은 삼성전자가 '반도체' 분야에서도 M&A를 성사시킬 수 있느냐로 모이고 있다.
오디오나 공조도 중요한 분야지만 삼성전자의 미래를 책임질 분야는 아니다. 파운드리(위탁생산)는 글로벌 1위 대만 TSMC와 격차가 아득히 벌어졌고, HBM(고대역폭메모리)은 SK하이닉스를 뒤쫓느라 급하다. 대통령 후보들이 토론회에서 걱정을 할 정도다. D램 가격이 조금 올라서 해결될 상황이 아니다.
삼성전자가 그간 반도체 분야에서의 실기(失期)를 만회하려면 대형 M&A가 가장 빠르다. 미국과 유럽의 반도체 관련 기업들 인수에 적극 공을 들이는 분위기다. 일부 잠재 매물들에 대해선 IB를 선정해 접촉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IB들은 한국 '1번 고객' 삼성전자를 잡으려 분주하다. 전엔 혹시 몰라 관계만 유지하는 정도였다면, 이제는 삼성전자의 적극적인 행보에서 자문 기회를 따내려 노력하고 있다. 플랙트그룹 인수 자문을 맡은 씨티가 우선 한시름 놓은 가운데 다른 IB들도 삼성전자의 입맛에 맞는 메뉴를 차리기 위해 동분서주 중이다.
다른 IB 관계자는 "최근 M&A 시장의 화두는 단연 삼성전자"라며 "유럽과 미국 쪽 반도체 회사를 인수하기 위해 동시다발적으로 이야기 중이고, 일부 거래는 자문사까지 선정해 움직인다는 이야기가 파다한데 우리도 기회를 잡으려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의 의지가 여느 때보다 높지만 반도체 M&A 성사 가능성은 불투명하다. 매물 자체가 많지 않고, 글로벌 핵심 산업이라 관련 기업들의 몸값이 상상을 초월한다. 호황기에도 하기 어려웠던 수십조원 규모 M&A를 지금 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큰 기업일수록 거래 난이도가 높다는 것이다.
각국 경쟁당국의 기업결합 심사도 험난하다. 명성이 예전만 못하다지만 '거함' 삼성전자에 반도체 산업 부흥의 기회를 줄 것이라 기대하긴 어렵다. 인공지능(AI) 반도체 분야는 특히 민감하다. 그나마 일부 기업에서 내놓는 비주력 사업부 정도가 현실적인 인수 대상이 될 것이란 평가도 나온다.
한 M&A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반도체 M&A에서 성과를 거두려면 수십조원을 써야 할텐데 돈이 있더라도 각국의 승인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다른 기업이 샀다가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하고 내놓는 사업이 현실적으로 접근 가능한 대상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