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기업과 투자자에 오일머니 쏟아질 것이란 기대감
시장에 중동자금 넘친다는 소문만 무성
대규모 투자 유치 소식은 잠잠
한국에 사무소 갖춘 중동 국부펀드는 전무
왕족 중심 특유의 모호한 의사결정 체계에
"수백억 투자 받아주겠다" 브로커도 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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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중동의 오일머니는 한국은 물론 전 세계 기업인과 투자자들에게 달콤한 유혹이다. 중동의 국부펀드는 웬만한 국가들의 연기금과 공공펀드들은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천문학적인 규모를 자랑하지만 의사 결정 구조는 베일에 쌓여있다. 이 때문에 기업인과 투자자 사이에선 네트워크만 있다면 마치 손쉽게(?) 중동 자금을 받아 낼 수 있을 것 같은 이미지가 자리 잡혀 있다.
한국 기업은 물론 국내 사모펀드(PEF)를 향한 중동발(發) 대기자금이 쌓여있어 출자 또는 투자 대상을 물색하고 있다는 얘기는 2~3년 전부터 퍼지기 시작했다.
2022년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방한하며 290억달러(약 40조원) 규모의 업무협약(MOU)을 체결하며 오일머니의 실체가 구체화 했다. 이듬해엔 윤석열 전 대통령이 기업 100여곳의 대표로 구성된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아랍에미리트(UAE)를 순방하며 우리나라와 중동 국가들과 관계가 가까워진 점이 오일머니 유입 기대감에 불을 지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대규모 개발 사업이 시작되면서 한국 기업들의 역할론에 힘이 실렸단 점도 한몫했다.
2025년 현재, 여전히 한국 시장엔 중동 자금이 대거 풀려있다고는 한다. 그러나 무성한 소문에 비해 자금의 실체를 명확히 알고 있는 투자자는 드물다.
실제로 대규모 투자를 받았다는 기업들의 사례 역시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사모펀드(PEF) 운용사들도 마찬가지인데 아시아 권역에 투자하는 대규모 글로벌 펀드, 한국에서 활약하는 초대형 로컬 펀드 몇몇을 제외하면 중동 자금을 받은 사례는 거의 없는 게 현실이다.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진 중동 국가의 자금은 대부분 국부펀드이거나 국영회사들이다.
UAE는 ▲아부다비투자청(ADIA), 아부다비개발지주회사(ADQ), 아부다비투자위원회(ADIC), 무바달라(Mubadala), 두바이투자공사(ICD), 루네이트(Lunate) 또는 애드녹(아부다비 국영 석유회사, ADNOC), 신재생에너지 기업 마스다르(Masdar’) 등이고 카타르는 ▲카타르투자청(QIA), 사우디아라비아는 ▲공공투자펀드(PIF) 등이 대표적이다.
이중 UAE 대표적인 4곳의 국부펀드의 규모는 2023년 기준 약 1조8000억달러, 우리돈 2435조원이다. 전세계 3대 연기금 중 하나인 국민연금의 기금운용규모 약 1300조원(4월 기준)을 훌쩍 넘는다.
중동 국가들, 그리고 그 안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왕족들은 한국 기업과 산업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소위 'K-컬쳐'로 대표되는 한국의 문화가 전세계적으로 확산하면서 중동 국가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문화·예술, 뷰티를 비롯해 IT를 기반으로 한 플랫폼 산업 등도 주요 투자 대상으로 늘 거론된다. 중동 국가들이 폐쇄적인 과거의 이미지를 벗어내고, 미래 지향적인 도시를 추구하면서 자연스레 문화와 IT 분야와 관련해 한국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졌단 해석이 가능하다.
이 같은 관심(?)과는 달리 한국 사무소를 운영하는 중동의 국부펀드는 아직 없다. 물론 해당 펀드에 우리나라 출신 인력들이 근무하는 경우는 더러 있다. 이런 점을 비쳐보면 중동의 펀드들이 한국에 거점을 마련해 본격적인 투자에 나서는 단계는 아니란 의미로 볼 수도 있다.
중동 국부펀드의 의사 결정은 일명 '톱-다운' 형식으로 알려져 있다. 촘촘하게 얽혀있는 왕족 일가들의 의사결정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전해진다. 수 백억원 수준, 운용 규모에 비하면 비교적 작은 규모는 실무자 선에서 처리(?)될 듯 하지만, 의외로 왕족 또는 실권자의 재가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의사결정 구조가 다소 불투명하다보니, 오일머니를 유치해 주겠다며 한국 기업과 PEF들은 현혹하는 사례도 종종 나타나고 있다. 사실 그들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인사들은 극히 소수이지만, 가깝다고 하는 인물들의 말을 투자자들이 딱히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게 맹점이다.
국내 한 중견기업 고위 임원은 최근 중동 국가 국부펀드로부터 투자를 이끌어 내주겠다며 접근한 인사가 '착수금'을 요구하자 검토를 접었다. 해당 브로커는 본인이 투자 결정을 하는 왕족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고, 수 백억원 수준은 무난하게 투자를 받을 수 있다며 접근했다. 투자 유치의 결과로 성공보수를 수수료 형식으로 지급하는 건 일반적이지만, 어떤 과정에서 어떻게 쓰일지 모르는 '착수금'을 요구하는 건 매우 드문 사례다.
출자자(LP) 다변화를 꾀하는 PEF 운용사들은 플레이스먼트에이전트(PA)를 통해 글로벌 큰 손들과 접촉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PA 인력들 가운데는 국민연금에서 일하며 주요 해외 기관 네트워크를 쌓아온 인사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다수의 PA를 접촉했던 국내 한 PEF 대표급 관계자는 "PA를 통한 중동 자금 유치는 사실상 어려웠다"고 했다. 실제로 국부펀드 몇몇과 연결을 해주는 건 사실이었는데, 이들이 한국으로 치면 국민연금, KIC 급의 초대형 LP라서 PEF가 해당 국부펀드와 직접 접촉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일부 운용사들은 국내 증권사들을 통해 중동 국가 LP들과 접촉하거나, 현지 전문가로 불리는 개인 브로커를 통해 미팅 자리를 가진 사례들이 있긴 하지만, 실제 투자 유치까지 성사된 경우는 많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 중동 국가들에선 기관투자가 출자와 관련한 다양한 컨퍼런스들이 열린다고 한다. 중동 자금을 받고자 하는 국내 기관들과 PEF 운용사들이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데 참석 비용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당 컨퍼런스들은 전세계적으로 공신력을 갖춘 언론사 또는 자문사들이 여는 컨퍼런스들보다 참가 비용이 훨씬 비싸지만, 전세계에서 수 많은 인사들이 몰린다고 한다. 실제로 중동에 본거지를 둔 수십곳의 기관들과 미팅 자리가 마련된다고 한다. 그런데 절반 이상은 그 실체를 파악하기도 어려운 곳들이 많았다는 한 참석자의 후일담도 있었다.